::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04

일시:12/8/2017 

선교중보기도: 

찬송가:190장<성령이여 강림하사> 


일소일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소일소, 일노일로라는 옛 고사 성어의 의미는? 그래서 화내는 일을 줄이고 웃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해 왔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세상 말도 있습니다. 방송프로그램에도 웃찾사!라는 프로그랩이 있었지요. 웃음 십계명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크게 웃어라, 억지로라도 웃어라 일어나자 마자 웃어라 시간을 정해 놓고 웃어라 맨 마지막이 꿈을 이루었을 때를 상상하며 웃어라 입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고 나니 행복해 진다는 말입니다. 꿈과 웃음은 한 집에 산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웃음보다는 울음이 더 큰 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울음의 종류를 나열해 봅시다. 슬퍼서 울고, 아파서 울고, 쓸쓸하고 외로워서 울고, 또 너무 기뻐서 웁니다. 눈물에도 색깔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영적인 은혜체험 때문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요.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이 흘리는 다양한 눈물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운다는 것은 아프거나 슬프거나 할 경우에 눈물을 흘리지, 큰 기쁨과 감사가 있을 때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요. 어른이 되고 보면 그런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추운 겨울날 뜨거운 국물을 먹으면서 어이 시원해하면 아이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뜨거운 국을 먹으면서 시원하다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것은 세상 경험이고 울면 복이 온다는 것은 신앙체험입니다. 


마5:4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애통일까요? 


첫 번째의 애통(울음)은 나의 지은 죄 때문에 생겨 난다. 죄의 결과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재앙을 불러 온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슬퍼하면서 운다. 세상 사람은 재앙 때문에 울지만 성도는 재앙의 원인인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우는 사람이다. 이것이 세상 불신자와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예를 들면 술을 매일 즐기다 보니 간암 4기가 되어서 죽음 직전에 있는 분이 자신에게 닥친 재앙 때문에 웁니다. 내가 왜 술을 마셨는고 하면서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술을 마신 후회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금주를 하지 않았던고 하면서 웁니다. 또 담배를 매일 하루에 2갑씩 피워 대다가 폐암 4기가 된 분이 내가 왜 담배를 피웠던고 후회하면서 자신이 당한 일 때문에 울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지요. 내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운 것 때문에 울지요. 


내가 매일마다 짓는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서 시련과 고난을 만났기에 웁니다. 내가 겪는 시련과 환난이 너무 심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면서 우는 것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그런 시련을 초래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운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두 번째의 애통은 우리의 이웃이 짓는 죄를 대신 걸머지고 대신 우는 울음이다. 이웃이 짓는 죄에 대한 정당한 분노, 또한 내가 속한 사회가 짓는 죄에 대한 분노도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저 사람이 저대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 형벌을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눈물을 의인의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는 의인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의인의 마음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의인들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의인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노아의 마음/방주 안으로 들어가던 날 노아의 마음은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벧후2:5<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산 위에서 지었습니다. 노아가 산 위에서 방주를 짓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그런 행동을 무시하면서 놀리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가 완성되어서 노아의 8식구를 방주 안에 들여 놓으시고 방주 문을 밖에서 닫아 걸었습니다. 밖에서 하나님이 닫아 걸었기 때문에 방주 안에서는 열 수가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던 날 노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성경에는 노아의 심령 상태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승리에 도취 되어서 방주에 들어 갔을까요? 봐라, 이 놈들 120년 동안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놀렸지 하면서 한 번 당해 봐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을까요? 방주 안에서 자축 파티라도 열었나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와 나의 식구들은 이제 곧 땅을 멸하는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겠지만, 방주 밖의 모든 사람들은 물에 익사할 것에 대하여 지극히 불쌍한 마음을 가졌겠지요. 마치 노아는 어두운 방주를 무덤처럼 느끼면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마음입니다. 범죄한 옛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이제 두 번째의 심판은 불 심판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노아와 같은 의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들도 구원해 내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가 살아 있는 목적입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입니다. 


롯의 마음/아브라함과 분리된 후에 소돔성에 롯이 정착하게 되지요. 소돔성 안에서 롯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을까요? 롯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경건한 신앙을 물려 받았습니다. 온통 주변이 어둠과 죄로 물들어 있었기에 그 죄와 어둠에 물들어서 함께 어울려 살았나요? 아니지요! 


벧후2:6-8절<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곳에 살면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때문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6번의 중보 기도 덕분에 롯이 목숨을 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베드로는 롯 자신이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에 몸은 살고 있지만, 그들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넘치고 있는 죄는 동성애였는데, 롯은 그러한 죄에 대하여 저항하면서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회는 동성애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고 용인했기 때문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죄악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롯의 가족은 율법을 따라서 반듯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죄악이 넘치는 곳에서 반듯하게 살자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아프겠는가 말입니다. 그 시대의 정신을 거슬러서 사는 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온 세상에 가득한 죄와 악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그 죄악에 물들어서 살아 가고 있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죽은 고래 같은 물고기는 물에 쓸려 내려 가지만, 살아 있는 송사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 갑니다. 우리도 이 시대 정신을 따라 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이 시대 정신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어야겠습니다. 


모세의 마음/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서 40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는 동안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했을까요? 


출32:31-32절<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서 광야 머물러 있었을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 진 중에서는 아론이 백성들과 함께 금 송아지 신상을 만들어서 경배하면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모세를 시발점으로 하는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모세가 했던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지워 버리고 이제는 모세로 일컫는 백성을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후로는 자기의 이름이 빛나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얼씨구나 좋다라고 모세가 받아 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가 인도한 신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는다면 내 이름을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책에서 제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인도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지옥에 들어 가 있는데, 나 혼자 천국에 들어 가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모세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뜻을 돌이켜서 그 백성들의 우상숭배 죄를 용서하셨지요. 이것이 모세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마음입니다. 광야에 있는 이 백성들과 생사고락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함께 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이런 의인의 눈물과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우리는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40년동안의 예언 사역 동안 그렇게도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울었던 예언자입니다. 가장 감성이 풍부한 예언자입니다. 렘9:1절<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북방의 강력한 세력인 바벨론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멸망 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예레미야는 그 백성이 회개하고 우상에서 돌이키기를 바랐습니다. 돌이키면 산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이 들었다면 응당 살기 위하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하는데, 이 백성들이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주야로 그런 백성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머리와 눈이 눈물 저장고가 되어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겠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의 슬픔/느헤미야는 당시에 페르시아의 술장관이었습니다. 왕의 측근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나중에는 페르샤 왕의 파송으로 유다 총독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파송되었지요. 느1:4<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의 형제인 하나니가 최근 예루살렘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에, 그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슬퍼했습니다. 유다가 망한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 성은 파괴된 채로 남아 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하면서 조상들의 죄 때문에 망했으니 싸다 싸 하면서 얼굴을 돌릴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성이 파괴된 채로 있으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 흘리면서 금식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롬9:3절<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자기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소원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그 소원이 강렬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원하는 일입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예수를 거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 적의를 거두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을 바울은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네로에게 참수를 당할 때까지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방해했습니다. 자신도 예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였지요. 아직도 그런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처럼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기를 바울은 원했지요. 그 소원이 너무 강렬해서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일어 났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겔9:1-8절/특히 겔9:4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자행되고 있는 우상 숭배의 가증한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모든 신의 백성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런 우상 숭배의 가증한 일에 가담하지 않았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신실한 이들은 4절 말씀처럼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던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탄식하면서 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살리기 위하여 서기관의 먹그릇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이 명하시기를 그런 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의 칼을 찬 사람들에게 이마에 표를 가진 자들은 해치지 말고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지요. 


의인의 눈물:이 눈물이 점점 교회 안에서도 없어져만 갑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짓는 죄에 대하여도 울어야 겠지만, 또한 나의 이웃과 내가 속한 사회가 짓는 죄에 대하여도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울 때에 복이 옵니다. 많이 웁시다. 이 금요기도회 때에 예레미야처럼 우리의 눈이 눈물 근원이 되어서 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만고의 의인, 예수의 울음! 히5:7절<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 왜 우셨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무엇을 위하여? 너와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피땀 흘려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세 번째의 애통은 아직도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성도들 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흘리는 눈물이 가장 고상한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아직 이라는 시간 프레임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미 성취되었으나 완성은 아직 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already, not yet/D-day,V-day 예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되었으나 완성은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담대한 기도/계22: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 주님이 오셔야 끝이 납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는 복은? 위로를 받는다. 

위로라는 의미는? 위로라는 단어는 곁에 라는 단어와 부르다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곁에 부름을 받아서 누군가가 우는 사람 옆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낱말이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행복이 무엇일까? 붙들고 목놓아 울 수 있는 분이 있다. 그 분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울 때에 그가 우리에게 위로라고 불리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요즈음의 시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이다. 공감이 사라지고 없어져 간다. 


자식들을 위하여 눈물 흘릴 줄 모르는 부모, 눈물 없는 정치 지도자들의 공허한 애국,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도 눈물이 말라 가고 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영적인 새 생명이 움터 오고, 눈물이 있는 곳에 소망이 싹튼다. 예수의 눈물! 바울의 눈물!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루어져 간다. 교회가 회개하면 세상이 부서진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의 죄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울어야 한다. 그러면 교회 앞에 눈물 흘리며 자복하는 통회자들이 많이 모여 있게 될 것이다.


켐연장

2017.12.13 04:43:42

2017년 12월 8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208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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