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05 
일시:12/15/2017 
선교기도:중국 
찬송가:543 어려운 일 당할 때 

1. 위로한다는 말은 달래다는 말이지요. 남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깊어야 겠고,넓어야겠지요. 그래서 남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 알고 해야 그를 동정하고 위로할 수 있지요. 이런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우리 켐연장 안에도 지금보다 배나 더 많으면 좋겠습니다. 벤뎅이 소갈딱지(머리)처럼 마음이 좁아서는 남을 위로해 줄 수 없지요. 우리는 남을 위로해 주기보다는 내가 위로 받기를 참 원하지요. 위로의 말 한마디가 나락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그 구덩이에서 건져서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하지요. 위로의 말들은 우리의 마음에 힘과 용기를 주지요. 

성경에 보면 위로를 잘 했던 분을 사도 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바나바 (바르 나바:예언의 아들이라는 아람어)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한번 살펴 보지요. 

행11:24절<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착한 사람이다. 마음의 바탕이 착하고 선하다는 말입니다. 간혹 보면 신앙은 좋은데, 사람 됨됨이, 성품이 영 아니다 라는 성도도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사람 됨됨이가 훌륭하면서 그 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행4:36-37절<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라고 하니(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들이 붙여준 이름이 바나바이지요. 바나바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무슨 일을 잘했습니까? 이웃을 격려하면서 위로하는 일을 잘했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옛날 개역 성경은 권위자로 번역했지요.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있는 자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개역 개정에서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풀어서 원래 히브리어 의미를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무엇 무엇 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그 무엇 무엇 하는 행위를 잘 하는 사람을 관용적으로 표현할 때에 쓰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위로의 아들이면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켐연장 교회 안에도 이렇게 힘들고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지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를 즐겨 하는 지체들이 지금보다 배나 더 많아 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켐연장 교회는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훈훈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고린도후서1:3-4>에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시로다" 우리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아직 연약한 사람들이기에 사람의 위로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사람은 가까이 있기에 사람의 위로도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필요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위로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이라는 말에 우리의 주위를 기울어야 합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위로는 비록 그 위로가 사람을 통하여 오더라도 그 근원은 다름 아닌 우리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과 고난에 처하여 있는 우리들을 우리 하나님이 건져 주심으로 우리의 심령과 삶에는 위로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 구원의 위로를 주시는 이유는 내 옆에서 내가 겪었던 그런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지체를 위로하여서 건지기 위해서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육신의 질병에서 고통 하다가 나았다면 그런 동일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서 말을 안하고 손만 잡아 주어도 큰 위로가 되고도 남지요. 

몇 일전 박상준 장로님과 강신문 권사님과 식사 교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식당이 개점이 안 되어서 로비에서 잠깐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장로님께서 자신이 요즈음 새벽 기도를 못 나와서 미안하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제가 장로님 이제는 연세가 드시고 눈도 어두우신데 안 나오셔도 됩니다. 나오시다가 넘어지시거나 혹은 독감이라도 든다면 더 힘드시니 그냥 새벽에는 집에 계시는 것이 좋으시다고 그랬는데도 미안해 하시기에 옆에 있던 사모가 말을 거들었습니다. 장로님, 사모인 저도 새벽 예배 안 나간다고 저 때문에 위로를 받으셔도 된다고 말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모도 건강 때문에 못 나오는데 노약자나 아프신 분들은 안 나오셔도 됩니다. 

나의 우울증/몇 해 전에 우울증을 심각하게 앓다가 나았지요. 한국에 나갔을 때에 담을 넘은 가지 중에 한 분이 우울증에 걸렸는데, 목사인 나도 우울증 걸렸다가 나았다고 이야기 했더니 큰 위로가 된다고 합디다. 그 형제는 사회적 지위도 있고 해서 남들에게 이야기도 못하고 끙끙거리면서 혼자 앓았는데, 목사인 나도 그런 고통에서 시달리다가 나았다고 하니 자기도 넉넉하게 병과 싸워서 이길 힘을 얻었다 네요. 올 여름에 보니 잘 회복이 되어서 쌩쌩하게 돌아 다니데요. 우리 교회에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나도 그렇게 아팠소 라고 말하면 그냥 그분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우울증 같은 것은 마음의 병이니 위로를 받으면 곧 회복하지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입니다. 우리의 몸에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한 2주간 아프잖아요. 마친 가지로 우울증은 마음에 감기 정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생기는 감기 정도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감기 안 걸립니까? 다 걸립니다. 몸에도 걸리고 마음에도 걸리지요.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나를 보고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정확하게 말한다면 스승인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제자 됨을 부인했지요. 새벽 닭이 세 번 울 기 전에 세 번 부인했지요. 그것도 누구 앞에서 말입니까? 서슬 시퍼런 대 제사장 앞에 끌려 가서 그랬나요? 아니지요. 대 제사장의 천한 계집종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쪽 팔리는 일입니까?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는 어떤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면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그것도 몇 번?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제자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체면을 이렇게 땅 바닥에 떨어지게끔 하셨을까? 베드로의 위신을 좀 세워 주시면 안되었나 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리더십을 그렇게 땅 바닥에 끌어 내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막아 줄 능력이 예수께는 없었는가? 아니지요.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22:31-32절<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나락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 예언하였습니다. 그 나락이 무엇이지요? 34절에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사탄은 제자들을 시험하였습니다. 키를 가지고 정곡인 밀을 분리해 내는 이미저리를 사용했습니다. 키에 흙과 찌꺼기와 밀이 섞여 있는 것을 키 위에 놓고 아래 위로 흔들면 정곡인 밀은 키 위에 남고 모든 찌꺼기는 키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요. 그것을 밀을 까부른다고 말하지요.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제자들은 큰 시험을 당하여서 모두 예수를 뒤에 두고 도망을 하게 되지요. 그 와중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게 되고요. 우리 주님이 이상한 중보 기도를 하지요. 베드로가 수석 제자로서 체면을 구길 일을 막아 주시면 좋겠는데, 그럴 능력이 우리 주님께 있는데, 우리 주님을 그런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중보 기도를 했나요? 베드로야 너는 나를 부인 하는 그런 나락에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덩이에 빠져서 나를 부인하는 동안에도 너의 믿음을 저 버러지 않도록 기도해 주마 라는 말입니다. 나락에 떨어지는 동안 믿음도 날아 가 버리지 않도록, 나락에 떨어지는 동안에 믿음만은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 주님의 이 기도 덕분에 베드로는 그런 시험 중에도 믿음을 잃어 버리지 않았고,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영성을 회복할 수 있었지요. 

왜 베드로는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 그런 구덩이에 빠져야 했는가? 앞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다가올 무시 무시한 고난과 시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주후 64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황제 네로에 의하여 순교하지요. 그리고 그 이후 200년 동안 10명의 황제에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요. 그래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 들어 가지요. 물론 그 가운데는 오랜 기간의 고난 때문에 배교 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 났지요. 이런 상황에 처하여 있는 사도 베드로가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베드로가 소리 높여서 형제들아 나도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라는 간증을 들었을 때에 성도들의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그런 배교 위험에 처하여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나락에 떨어졌다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지요. 당시 성도들이 고난 시련 속에서 배교의 위험 속에 있었지만, 베드로를 보면서 영성과 믿음을 회복할 수가 있었지요. 베드로 자체는 큰 위로가 되었지요. 믿음을 꿋꿋하게 지킨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부인했지만 다시금 회복한 모습으로서 위로를 당시 성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의 성공담도 위로를 끼치지만, 우리의 실패도 위로를 끼칠 수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 요한은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던 그 제자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에는 예배 드릴 때에 그냥 강대상 뒤에 앉아 있기만 해도 온 교회 공동체에는 위로와 기쁨이 넘쳤다고 합니다. 온 교회 공동체가 사도 요한이 설교를 하지 않고, 그냥 강대상 뒤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그냥 위로가 넘쳤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이런 유형의 신앙인들이 많이 있어야겠습니다. 그 분이 있는 것이 위로가 되는 성도 말입니다. 그 분이 있으면 정신이 사나워 진다는 그런 분은 없어야겠습니다. 그냥 그 분이 원래 자신이 늘 앉아 있던 자리에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그 주위에 있는 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위로가 필요합니까? 환난 중에 있는 자, 낙심 중에 있는 자, 두려움 중에 있는 자, 근심 중에 있는 자, 죄악 가운데 있는 자, 고독한 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은 위로가 되십니다. 

혹시 환난과 고난과 시련 중에 있지는 않습니까? 
시50:15절/"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91:14-16절/"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혹시 신앙에 회의가 들어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시62:5-6절/"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오직 그 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나라 6.25사변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배고픔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향하여 한 종군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당신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병사들의 한결 같은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시요.나에게 확실한 내일을 주십시요” 나에게 내일에 대한 확실한 소망만 있다면 아무리 전쟁터의 상황이 혹독해도 다 참아 낼 수가 있을 거예요. 오늘이 나의 생애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를 엄습합니다.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개념을 모르지만, 인생은 하루 살이에 비하여 장구한 세월을 살기에 내일이 있고, 내일의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내일은 오직 우리의 소망이신 우리 주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낙심 마귀! 우리의 신앙에서 나오는 힘을 빼앗아 가는 마귀이지요. 

혹시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사41: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42:11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심과 불안과 두려움은 같은 우물에서 솟아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면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집니다. 
어떤 마귀? 불안과 두려움 마귀! 

염려와 근심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빌4:6-7절/"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요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걱정 마귀! 이 마귀가 쏘는 불 화살을 맞으면 온 세상 만사를 근심하면서 걱정하면서 살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이런 걱정을 기우라고 하지요. 걱정마귀의 불화살을 맞으면 온갖 쓸데 없는 걱정을 병적으로 하게 됩니다. 

죄악과 정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롬8:1절/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정죄마귀가 쏘는 화살을 마음에 맞으면 늘 죄의식 속에 시달리면서 살게 된다.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요14: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히13:5절/"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귀의 종류도 천차 만별합니다. 차차 마귀, 낙심마귀, 섭섭마귀, 졸음마귀,불평마귀, 걱정마귀, 미움마귀, 교만마귀, 원통마귀, 좌절마귀, 불안마귀, 의심마귀, etc. 

구약의 백성을 위로하셨던 하나님.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구약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셨지요.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제 2의 출애굽이라고 부르지요. 

사40:1-3절<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을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들 통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구약 성도들의 마음에 닿는 말씀입니다. 말이 논리적이고 지성에 호소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감동을 주는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는 말씀은 마음을 touch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격려와 위로의 말씀입니다. 신의 백성이지만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북방 땅에 포로로 잡혀 온지 70년이나 훌쩍 지났습니다. 조상들과 그리고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고달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런 고달픈 생활이 끝났다고 우리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고 지었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다는 소식이 아닙니까? 이 소식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지요. 고달픈 포로 생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서 떠나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찾아 오셔서 자신들을 다스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전부인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들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됨에는 틀림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눅2: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 할배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분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가 무엇인가? 이 당시 온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고난에서 건져 주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를 하나님이 보내 주시겠다고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예언을 했었습니다. 이 구약의 예언을 시므온 할배는 믿었고, 기다렸습니다. 성령으로 한 평생을 기도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 시므온 할배가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신탁을 그의 말년에 주었지요. 그래서 시므온 할배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아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들어 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 성령께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해 주었고,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지요. 아기 예수께서 무엇이라고요? 이스라엘의 위로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의 위로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의 위로도 되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을 새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는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위로가 되십니까?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최대의 원수인 죽음도 우리 주님은 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원수가 죽음이지요. 또한 열려져 있는 지옥의 대문을 우리 주님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없도록 막아 버리셨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의 삶에 이런 영적인 위로가 가득 넘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하늘에 오르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최대의 위로가 되십니다. 성령을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파라클레토스! 위로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내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나를 위로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받고 싶으신가? 무엇을 받아야 하는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충만하게 거하면 거할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더울 커집니다. 성령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위로를 느낄 수 없습니다

켐연장

2017.12.18 18:58:25

2017년 12월 15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7/12152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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