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08
일시:1/5/2018
선교기도:
찬송가: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1.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을까? Cur Deus Homo!
요1: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하지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떤 형태로 존재해 있었는가?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성자 예수는
창세전에 독립된 실존으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2천년 전에 우리들과
같은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 땅에 태어났습니다.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똑 같은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입니다. 2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에게서 우리
주님 예수는 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화육’이니 ‘성육신’이니 하는 전문
술어로 부르지요.
왜 우리 주님 예수께서 저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요?
마1:23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의 백성들인 우리들을
죄에서부터 건지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오셨다 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8:9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나라에서 이 낮은 땅에 오신 이유는 가난한 우리들을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가난과 부요함은 돈이 있고 없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부요와 영적인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모든 하나님의 충만으로 계신 분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이지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왕궁에 살던
왕자가 그 왕궁을 버리고 다리 밑에 움막집에 살고 있는 거지에게로 와서 함께 그 움막 집에서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몇 해전 눈이 많이 왔을 때였습니다. 그 때 우리 집 뒷마당에 눈이 소복 소복 쌓여 있었습니다. 눈
위로 풀과 나뭇가지가 솟아나 있었습니다. 새떼가 뒷마당에 내려와서 나뭇가지와 풀 주위에서
짹짹거리면서 시끄럽게 짖어 대었습니다. 뒷마당에는 사실 새들이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불쌍하게 보여서 현미 쌀 한줌을 던져 주었습니다. 새가 놀랄 것 같아서 조용하게 문을 열고 스크린
도어를 열었습니다. 한줌의 현미 쌀을 던졌더니만 새들이 모두 놀라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들은
내가 그들을 잡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혼비백산 하여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들이 안
날아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내가 새들이 되어서 그들의 언어로 coomunication할 수가
있었다면 새들은 내가 던져 주는 모이를 즐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새들은 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푸드득 거리면서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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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었는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이 아무리 알려 주어도 인생들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
높이를 낮추어서 인생들과 같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communication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성육신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갈4:4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하늘의 영원한 것들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은혜입니다.

2. 지난 송구 영신 예배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장래의 세대, 우리 후 세대들을
세우소서입니다. 교회가 다음 세대, ,next generation을 선택해서 키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시144편 12절<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다> 큰 나무와 모퉁잇돌 이미저리가 우리 아들과
딸들의 장래 모습입니다. 우리 슬하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모퉁잇돌과 큰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2018년도 한 해 동안 우리들은
우리들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신앙으로 키우는 일에 집중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무슬림 가정들은 보통 7-8명의 자식을 놓아서 기르기 때문에 무슬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자식을 하나, 둘 정도 낳아서
기릅니다. 좀 많이 낳은 분들이 3-4명 정도의 자식을 낳아 기릅니다. 무슬림 인구의 증가와는
그리스도인의 인구 증가는 쨉이 안됩니다. 한 세대, 두 세 대 지나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안에서
소수 그룹으로 전락할 수도 있지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둘 낳아서 신앙으로 잘 양육하면 좋은데,
그것마져도 그리 전망이 밝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들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에 올인 해서
가르치고 싶어하지, 신앙적인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이 넘칩니다. 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처럼 말입니까? 사무엘처럼, 또 누구처럼?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세례요한처럼 말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결코 그 아이를 이상한 아이로 만들지 않습니다.
엡5: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이 술이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지요. 술은
각성제(활성제)가 아니고 억제제입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이성과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들어 오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속도가 느려집니다. 음주
운전을 하게 되면 큰일이지요. 음주 운전을 하게 되면 사고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의 반응이 늦어
지기 때문에 말입니다. 술은 억제제라서 머리 회전도 느려지고, 행동도 느려지고, 말도 어눌해지고,
모든 몸 속의 감각이 저하되게 되지요. 머리에서 신경 전달 물질은 많이 만들어져서 기분은 좋아
지지만 몸은 망가지지요. 술이 억제제라서 그렇습니다. 술 취하게 되면 방탕하고, 난폭하고,
무절제한 행동들이 나오지요.
그러나 성령은 억제제가 아니라 활성제 즉 각성제입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 날까요? 성령은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을 열어서 아주 예민하게 만들어
줍니다. 머리 회전이 빠르게 만들어서 이해력과 기억력과 또한 통찰력을 높여 주어서 공부도
잘하게 만들어 주지요. 또한 판단력과 분별력도 끌어 올려 줍니다. 또한 정서가 대단히 안정화
됩니다. 또한 열정과 의지가 생겨 납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생겨 나고 삶의 목적이 생겨납니다.
또한 몸의 면역력도 강화되면서 몸에 힘이 넘쳐 나게 됩니다. 왜냐고요? 성령은 활성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이 충만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집니다. 부모와 어른들과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려고 힘쓰고요. 술을 먹으면 어른들에게 대들고 싸움질을 하지만, 성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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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하면 어른들에게 순종하기를 힘쓰게 되지요. 이런 결과들이 나타나는데도 우리 아이들이 성령
받는 것을 금하시겠습니까? 성령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알코올을 먹이시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술 먹여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마시게 하면 유익한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마시는 것이라고 기록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2:13절<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계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요한 복음 7:37-38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령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그런데 성령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 때문에 선뜻 부모님들이 내 아이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성령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하고서도
그 일이 성령을 거스리는 일 인줄 모르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자신이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모르고 있으니 그것이 답답한
일이지요. 그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은 뒷발로 가시 채를 차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뒤를 안보고 뒷발로 가시 채를 차면 발에 피가 나고 아프지요. 뒷발로 차니 발에 왜 피가
나는 지 알지도 못한 채로 자꾸 뒷발질만 하니 상처는 깊어만 가지요.
성령이 임하면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고, 아이들은 예언을 하게 되리라고
사도행전에서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들의 삶이 안
바뀌거든 하나님에게 따지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이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삶에 유익한 좋은 것들을 부산물로 많이 주십니다. 성령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확신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기도해야 하는 기도 제목은 ‘택한 다음 세대를
일으키소서!’입니다.
3. 성경에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이미저리를 사용해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낮아진 자존감은 회복이 됩니다. 우리의
id? 삼중적인 정의:피조물, 구속, 성령의 전/
피조물: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진화의 과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 우주의 주인 이신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하여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우리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네페쉬 하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예술 작품입니다. 공장의 기계로 찍어낸 제품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하나 하나는 작품이기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꼭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조금씩 조금씩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지요. 불순종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 지게 되었고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이
되었지만, 그럴지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첫
번째 아이디는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구속:이런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는 죄의 종이라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이 죄의 예속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독생자 예수를 보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풀어 내어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피 값으로 우리를 죄에게서 풀어 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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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목숨 값이 속전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되찾았지요.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자신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서 모형 배를 만들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습니다. 비가 많이 온 후에 개천에서 모형 배를 잘 되는 지를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모형
배가 그만 급류에 휘말려서 하류로 떠내려 가 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그 배를 건져 내려 하였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잃었다는 상실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몇 일 후에 모형 배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보니 자기가 만든 모형 배와 비슷한 배를 멀리서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배는 자기가 만든 배였습니다. 그 주인에게 그 배는 자신이 만든 배라고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배라는 증거가 없잖아요. 주인은 그 아이에게 돈을 만들어서 가져 오면 팔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모형 배라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시 돈을
모아서 배를 샀습니다. 자신이 만들었던 모형배를 다시 돈 주고 샀습니다. 이 모형 배는 그
아이에게는 이중적인 소유입니다. 그 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돈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이 모형 배와 아이와의 관계가 우리와 우리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구속물입니다. 창조는 손으로 만들었지만, 구속은 피흘림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우리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예수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고전6:19-20절<~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우리의 정체성은
‘값으로 산 자’가 되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값 주시고 우리를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어떤 값?
비할 데 없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어떤 값인가? 핏값을 치렀다. 어떤 핏값인가? 하나님의 하나
뿐인 아들의 목숨 값을 치렀고 우리들 하나 하나를 사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대단히 값나가는 보배로운 존재들이다. 엄청난 대가를 하나님이 치렀다.
성령의 전:이런 이중적인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하나님에게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소유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확정하기 위하여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자신에게서 나오는 성령님을 보내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6:19절<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몸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성령은 마치 도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이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에
도장을 찍거나 아니면 서명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계약서는 효력을 발휘하지요. 마찬 가지로
성령은 도장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유목민들이 자기의 소유의 양과 소를 타인의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불로 궁둥이에 도장을
찍었지요.
고린도후서1:21-22절<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기름부음은 성령을 상징하지요. 성령이 도장과 같이, 성령이 보증과 같은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는 것은 삼중적인 행동을 통하여서입니다. 우리를
창조했기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피값으로
구속하심으로써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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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우리는 비록 세상 사람들에 비하여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시16:3절<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켐연장

2018.01.09 14:13:29

2018년 1월 5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105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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