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11

일시:2/2/2018 

찬송가:337<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염려와 그 해결책/

마6:25-34 염려,걱정,근심/불안,두려움:모두 부정적인 감정 상태! 염려와 걱정과 근심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조금 더 진행하면 정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지요. 불안과 두려움은 염려와 근심보다는 한층 더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이지요. 염려와 근심이 무엇일까? 그것은 '흔들의자'혹은 '그네'라고 말할 수 있다. Rocking chair! 저기 저 뒤에 안내석에 흔들의자가 몇 개 있습니다. 흔들의자는 앞뒤로 흔들거리지만 여전히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염려와 근심은 어떤 건설적인 결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키가 작다는 handicap때문에 키가 한 규빗 정도 더 컸으면 좋겠다는 염려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적으로 키는 커지지 않지요. 그래서 염려는 흔들의자 혹은 그네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또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새앙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새앙쥐는 우리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지만 우리 집안 어디엔가 숨어 들어와 있습니다. 연필이나 볼펜 크기 같은 구멍만 있으면 집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새앙쥐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앙쥐는 우리 교회 구석 구석에 들어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염려도 그렇지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슬며시 들어와서 우리의 삶에 해악을 끼칩니다. 그래서 염려는 새앙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염려는 흔들의자, 혹은 그네나 새앙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염려를 무엇이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염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지요. 25절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고, 31절에도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또 34절에도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27절에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가 있느냐. 염려하다는 동사는 메림나오라는 글자를 쓰는데 이 단어는 분리하다 나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염려는 내 마음을 여러 개로 쪼개어 놓고 분열시켜 놓습니다. 하나로 통일 되어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염려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통일된 마음이 쪼개어 지게 되고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약화되게 되지요. 그렇게 마음이 나누어지고 분열되게 되면 온갖 종류의 신경질환이 생겨 나지요. 염려는 정신 세계만 교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육체에도 손상을 입힙니다. 불면증도 생기고요. 소화도 잘 안되고요. 아무튼 염려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모두 손상을 끼칩니다. 


왜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을까요?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 염려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양립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생겨 나면 세상 염려는 우리 마음에서 달아나고요, 그 반대로 세상 염려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 오게 되면 믿음이 우리의 마음에서 죽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성도들 가운데서 믿음 좋은 성도 보았습니까? 세상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생겨 나는 것이지요. 세상 염려 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무엇이라고 책망했나요? 30절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했지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예수를 따라 살지만, 믿음이 적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면서도 염려가 마음에 일어나지요. 


예수님 당시의 서민들은 어떤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까? 생활고입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 가는 노동자들이 서민들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품을 팔아야 내일 먹을 거리를 살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 주민들은 주거 문제는 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겉옷만 있으면 어디서나 잘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셔야 하는 끼니 문제는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일거리가 있어서 노동 품을 팔아서 먹을 거리를 벌었지만, 내일도 일거리가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의식주 문제는 중요합니다. 당장 수 중에 돈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데 그런 우리를 돕는 손길이 없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 보스톤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당장 먹을 거리가 없어서 배곯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실패하여서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분도 없습니다. 모두 의식주 문제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염려가 우리를 짓누르나요? 우리의 앞날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학위를 잘 마칠 수 있을까 없을까? 학비는 잘 조달 될 수 있을까 없을까? 직장에서 레이오프 되면 어쩌나 같은 그런 염려 말입니다. 또한 몸에 병이 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염려를 합니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합니다. 우리 자식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염려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닥쳐와 있는 사건들, 그것을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큰 곤경에 처하기에 염려하는 것을 우리 주님은 인정하셨습니다. 34절에는 한 날에 있는 괴로움은 그 날 하루로 족하다고 하시면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닥쳐온 그 괴로움을 걸머지고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병적으로 염려 근심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염려를 가슴에 담고 사는데, 내일은 또 다른 염려를 붙들고 사는 분들 말입니다. 염려가 마음에 없으면 오히려 염려 없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분 말입니다. 그래서 늘 이런 저런 염려를 붙들고 염려하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염려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병적인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염려를 병적인 염려라 하지요.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병적인 염려에 사로잡혀서 사는 분 계십니까? 이런 분이 우리 가운데는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주위에 몰려 와 있는 생활고에 대하여 염려 하는 분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를 가리키면서 그리고 들에 피는 꽃을 가리키면서 위로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들은 자기들 스스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추수한 것을)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누가 기릅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새들을 기르십니다. 요즈음 겨울이라 우리 뒤 마당에 늦가을에 그렇게도 자주 많이 출몰하던 참새 떼가 어디가 있을까? 갸들은 이 엄동 설한 겨울에 무엇을 먹고 있을까? 참 신기합니다. 또 봄이 되면 신기하게 그 참새떼들이 죽지 않고 나타납니다. 하늘 아버지가 먹여 살렸습니다. 그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참새 떼 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들이지요. 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 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그렇게 아름답게 입혔거늘, 우리는 이런 이름 모를 들풀보다 훨씬 더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얼마나 가난했을까요? 당시 1세기의 서민들보다 더 가난했습니다. 마8:20절<~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오직 우리 주님은 겉옷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 염려가 없었습니다. 세상 염려에서 해방된 완전 자유인입니다. 왜 자유로웠을까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분처럼 우리 주님은 사셨지요. 


이런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 나는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와 분리되어 저 하늘 위에서 잠자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와 계십니다. 32절에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무엇을 아신다고요? 우리에게 먹을 거리가 있어야 하고,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살 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절실히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정도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보스톤 땅의 삶을 아셨고 느꼈다면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보시고 아셨다면 우리가 나서서 염려하면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걱정을 무엇이라고요? 기우라고 하지요. 쓸데 없는 근심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셨고, 현재도 채워 주고 있고, 미래에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마태의 이 본문을 읽고 난 다음에 우리 하나님은 우주 은행 총재이시다 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한국 은행 총재도 아니고, 미국 연방은행 총재도 아니고 우주 은행 총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엘리야의 경우 구약의 백성이 광야 생활 할 때와 가나안 땅에 입주하여 살 때에 롬8:32절<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도록 내어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가 기도하면 됩니다. 어떤 기도? '믿음의 기도'를 하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 믿는데도 생활의 염려와 걱정이 마음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빌4:6-7절<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둘레에 보초병처럼 지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내 마음과 생각에 염려라는 새앙쥐를 슬며시 넣어 주면 우리의 마음에 염려가 시작되지요. 하나님의 평강인 보초병은 그런 염려가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는 말입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상처 난 심령을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둘러 진칠 때에 염려와 근심은 달아 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에 activation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어떤 문제로 마음에 염려가 일어날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고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 중에 말했다면 그렇게 믿어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은 했는데, 실제로 염려하던 일이 하나님께 맡겨지지 않지요. 믿었다면 그 믿은 대로 결과가 일어나는 데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말 따로 믿음 따로 놀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는 자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행기의 두 날개:믿음+기도! 하늘로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가면 땅의 산물인 염려와 근심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내 염려를 맡깁니다 라는 기도의 말을 믿음으로 했다면 내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께 그대로 옮겨 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 할 때에는 염려와 근심 보따리를 다 풀어 놓아서 하나님께 맡겼다가 기도가 끝나면 그것을 또 보따리에 싸서 돌아갑니다. 집에 돌아가서, 즉 삶의 자리에 돌아가서 또 똑같이 염려하면서 근심하면서 삽니다. 이런 분들은 믿음의 기도를 한 것이 아니지요. 이런 분들은 벧전5:7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벧전 5:7절<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맡겨 버리라 그랬는데, 기도할 때에는 맡겼다가 기도 끝나면 그것을 다시 찾아서 삶의 자리로 돌아 가는 분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믿음으로 기도하면 내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께로 옮겨 가게 됩니다. 기도했는데도 안 옮겨져 가는 분들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내가 내 입에서 나오는 기도의 말에 내 믿음을 실을 수 있게 도와 주십시요. 내가 기도한 데로 믿어 지게 도와 주십시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다가 보면 어느 날부터 믿어 지게 됩니다. 내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라고 기도 중에 말하면 그것이 믿어 지는 순간부터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마음에 자유와 평강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이 염려와 근심에서 놓이게 되고 평강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이 내 염려와 근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비행기가 발명되어서 하늘을 날아 다니던 초창기 때 있었던 일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날틀을 만들었지요. 그 후 쌍엽기가 등장하여서 하늘을 날아 다닐 때 였습니다. 어떤 조종사가 그런 비행기를 타고 날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후미에서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새앙쥐가 무엇을 갉아 먹을 때에 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심하게 들렸습니다. 새앙쥐라는 생각이 들자 이마에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조종사는 조종간을 당겨서 하늘 높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새앙쥐와 같은 설치류는 고공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솟구치자 갉아 먹는 소리가 중단되었습니다. 무사히 조종사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염려 근심은 새앙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비행기가 두 날개로 고공으로 솟구쳐 올라 가듯이 성도는 믿음과 기도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올라가면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근심? 

세상 근심은 없어야 하지만, 그러나 한 가지의 근심은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근심이 거룩한 근심입니다. 이것을 영적 근심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고후7:10절<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하지요. 이런 거룩한 염려는 교회를 위하여 하는 염려이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다가 보면 이런 염려가 생깁니다. 이런 염려를 가지고 주께로 나가면 우리의 삶에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매일의 삶에 곰씹어 보면서 세상 염려하면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켐연장

2018.02.06 16:54:54

2018년 2월 2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202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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