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본문:17:11-18

 

감사하면서 삽시다.-성령충만하면 나타나는 삶의 방식!

 

열명의 나환자가 치유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나환자 그룹은 9명은 유대인이었고, 명은 이방인 사마리아 인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무리가 되어서 교제했는가? 안했다.

4:9절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습니다: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상종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없다는 말이지요. ?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장벽이 놓여 있었지요. 그런 장벽이 생겼을까요?  인종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인종의 장벽을 깨뜨린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습니다. 나환자 10명의 모습을 보십시요. 인종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 되어서 나환자 공동체를 이루어서 사이 좋게 살아 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사회에 차별이 있을까요? 내가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있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니 비교 때문에 차별이 생겨나지요.

차별:부자와 빈자의 차별~유식자와 무식자의 차별~인종차별(흑백갈등)~성차별(남존여비) ~지역차별.

차이는 인정이 되어도 차별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차이는 영어로는 difference이고 차별은 discrimination이지요.   나병이라는 것이 나환자들을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모두 나환자가 되어야 하나?

어떻게 이런 기적이 집단적으로 일어났을까? 마디로 믿음의 순종 때문에! 믿었고 믿음에 따른 순종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

우선 나환자들의 요청?

13-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응답?

14 전반부-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 

나환자들의 action?

14 후반부-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병나음의 기적을 10 모두가 집단적으로 체험을 하게 되었다. 1-2사람이 체험한 것이 아니라 10 모두에게 신유devine healing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선 나환자들의 간구부터 살펴봅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나환자의 간구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ejlevhson hJma'".  그릭으로는 단어로 되어 있다. 화려한 미사 여구로 장식된 기도문이 아니다. 투박한 단어 속에 10 모두가 자신들의 마음 전부를 실어서 주께 드렸다. 아주 훌륭한 간구다. 우리 주님이 하늘 위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땅에서 이룰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께 기도했다.  당신은 우리 주님이 나를 보시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가라! 이것이 기도 응답의 첩경이다.

여리고 성에 사는 거지 바디메오도 우리 주님이 지나가실 때에 어떻게 간구했나? 10:48<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ejlevhsovn me. >여기서도 투박한 간구를 있다. 단어로 되어 있지요. 엘레오라는 헬라어를 사용했다. 맹인의 눈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2: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인하여>

33:19<~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 주신다. 어떤 조건을 구비해야만이 받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3: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

 

우리 주님의 응답?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은 이런 의미이다. 내가 이미 너희 몸을 치유하였노라 너희는 너희의 회복된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 제사장들의 고유한 업무 중의 하나가 문둥병을 감시하는 일이다. 나병이 의심되는 사람을 검사해서 나환자는 마을 밖에 격리 시키고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은 검사하여서 공동체에 복귀시키기도 하는 일을 하지요.

 

10명의 나환자가 제사장에게 가다가 병나음을 체험했습니다. 어떻게 갔을까? 믿었으니 가지 않았겠습니까? 믿음과 순종! 순종은 믿음의 모험입니다. 과연 나라면 수가 있었을까? 밑져야 본전이다. 제사장에게 갔는데 나았다면 그저 걷기 운동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하면서 갔겠는가? 아니다. 믿음을 실었고 순종하여서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았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 장군도 요단강에 몸을 일곱 잠그는 일이 있고 다음에 깨끗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타난 기적이다. 당신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믿음으로 순종해 보라!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나? 16절에는 사라미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길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나? 제사장에게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즉시로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아래 엎드려 경배했다. 예수께 감사했다.  15절은 사마리아 인은 자신의 몸이 나은 것을 알고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외치면서 예수께 돌아왔고, 16절에는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다.

 

<하나님께 영광>=하나님을 찬양,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의미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정체가 우리의 앞에 드러날 때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가운데 숨어 계시는 분이신데 분이 밝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 내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라고 말하지요. 시대에 임금이 왕복을 벗고 평민의 복장을 하고 민정을 살피러 나가지요. 변복을 하였기에 아무도 왕임을 알아 없습니다. 그러다가 왕이라는 것이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모든 사람이 왕에게 엎드려 절하게 되지요. 왕이라는 것이 알려 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감추어져 있던 왕이라는 정체가 알려지게 되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도 그랬지요. 자기 배에 타고 설교 하고 있는 분이 그냥 랍비 정도 인줄 알았지요. 그러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으라는 분의 명을 받들었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는 기적을 보았지요.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취했던 행동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하지요. 자기 배에 앉아 계시는 예수가 랍비 정도 인줄 알았는데 랍비 이상, 무엇이라고요 바로 메시야 임을 알게 되었지요. 무엇을 통하여 말입니까? 잡아 놓은 고기를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알게 되었지요. 예수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메시야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도 하나님이 기적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상식적인 경험으로는 결코 일어 없는 일들이 믿었기에 일어 납니다. 나음의 기적을 위시하여서 우리의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기적들이 우리 하나님을 드러 내는 일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적이 나타나도록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교회가 이런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능력을 잃어 버린 현대 교회들 중에 하나가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을 위시하여서 모든 10명의 나환자에게 어떤 영광이 나타났나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신유의 기적을 통하여 10명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지요. 숨어 있던 하나님을 이제는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   사람만이 예수께로 돌아 와서 감사했습니다.

 

9명의 유대인 나환자들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해결사! 기적을 일으키시는 , 병을 치유하시는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는데도 어찌 그런 기적이 일어나나요? 얼마든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아도 그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9명은 낫기를 위하여 예수께 왔는데 목적이 이루어지자 지체하지 않고 예수를 떠났습니다. 신앙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까? 치병에 두고 있습니다. 벌어서 먹고 사는 일에 신앙의 목적을 두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상에 물들어 사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기복 신앙은 번영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앙입니다. 자신의 삶에 세속적인 성공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합니다. 예수 믿는 병들어 있는가, 예수 믿는데 가난한가 하면서 가난하고 병들어 있는 성도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지요. 신앙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다고요? 세속적인 성공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9명의 나환자와 같은 신앙입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 나오십시요 하면서 권했더니 사람이 당신이 나가는 교회는 교회입니까 라고 묻습디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100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입니다 라고 했더니 나가겠다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은 보험 외판원이었습니다. 교회가 적으니 사람이 적을 것이고 사람이 적으니 보험을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갔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의 의도는 나병에서 낫게 됨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했습니까? 10 모두가 영적인 구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기적을 통하여 기적 너머에 있는 예수로 인한 구원을 얻기를 원하셨는데 9명은 모두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머지 명만이 하나님이 주신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영혼이 구원 얻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0명에게 나병을 내리신 이유는 나병을 통하여 주님을 알라고 그렇게 했는데, 오직 사람만이 주님의 의도에 바로 반응을 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감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본문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인가? 감사하는 자이다.

50: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50:22절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을 잊어 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없으리라> 하나님을 잊어 버린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지적으로 모르는 자인가? 아니다. 지적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누구보다 알고 있다. 그러나 속에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방인의 삶의 스타일은 로마서 1: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섬김이1

2018.11.26 12:57:05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11232018.mp3


기술상문제로 음성이 매우 작게 녹음되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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