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보스톤을 넘어서:사역-담을 넘은가지
1997년 12월 10일.  한국 서울

  「통일건국을 위한 10만의 리더를 양성하자」

  1997년은 한 시대가 고통스럽게 끝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50년을 이어온 남북한의 분단국가, 30년간
계속되어온 개발경제체제, 그리고 주체사상체제가
실질적으로 붕괴되었음을 한 해 동안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증명하고 있다. 한 시대를 이끌어온 논리와
시스템, 조직과 세력들이 태양이 빛을 잃듯 힘을 잃고,
이제는 오히려 모든 것을 삼키는 불랙홀처럼 변화하고
있다. 절망과 불안, 무질서와 무기력함이 삭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북한의 전면적 기아사태로 시작하여 남한의
국가부도위기로 마감되는 1997년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남북한의 분단국가가 수립된 지 50년만에 실질적으로
붕괴된 해로 평가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 평가를
‘지금’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분단국가의 총체적
붕괴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면 할수록 ‘통일건국’의
비전은 더욱 더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분단된
국가의 총체적 붕괴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비전은
‘통일건국’이다. 통일건국의 비전은, 우선 세계사의
축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남북한 사회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의 민족사회는
조선말의 주자학적 정신구조와 일제∙분단시대의
사회문화구조, 그리고 지난 30년간의 정치경제 구조가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시야를 지난 50년간의 분단
역사에서 지난 1백년, 4백년간의 역사로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의 민족적 위기는 4백년 전의 전쟁과 1백년
전의 망국, 그리고 50년 전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한 고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통일건국’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권을 한번 잡는 것, 나라를 한번 경영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사고체계를 재검토하는 것이며, 사회와 국가가 작동해온
기본원리와 그 시스템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뚜렷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리더십을 가진 사람과 조직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분단국가 붕괴했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통일건국’을
이루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종시대와 같은 민족사의
황금시대를 21세기에 다시 열기 위해서도 ‘통일건국’을
이루어야 한다. 수십만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고 있는
북한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황폐해졌다. 남한에 휘몰아치는 있는 경제위기는 30년 간
쌓아 올린 경제사회의 기반 그 자체를 흔들고 있다.
통일된 새로운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또 다시
망할 수밖에 없다.
  
  1987년의 6월항쟁 세대가 지난 10년간 무기력했던 것은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일건국’이 우리 세대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통일건국을 위한 기본 전략은 새로운
리더를 창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4백년 전,
임진왜란이라는 망국의 위기 앞에서 이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통일건국을
이끌 ‘10만의 리더’(十萬養將)가 필요하다. 통일건국에
자신의 삶의 5%를 투여하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하고,
이른바 ‘통일건국을 위한 모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세계사의 주류를 직시하면서 우리의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경제 사회,
정치 문화의 작동원리와 시스템을 만들고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 시대는 통일건국의 시대이며 우리 세대는 그
중심에 있다. 밝아오는 1998년은 남북한의 분단정부 수립
50주년이 아니라 통일건국운동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말』지 1998년 1월호)        
  

1999년 2월 2일

  거의 2년 간 헤맸다. 내가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사명(mission)을 저버렸다. 97년 초여름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할 때 새벽 기도에서 하나님과 약속한
그 응답, “천일을 기도하고 만일을 준비하라. 그러면
내가 너로 하여 네 민족을 구원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나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했다.

  97년 3월 말에 귀국한 직후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고, 그 힘으로 여름이 오기 전에 북한동포돕기
한주한끼굶기운동(금요일점심굶기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8월에는 3박4일간 제1회 북한교회재건 사역자
연수에 참가했고, 북한선교를 준비하는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일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
행정대학원에 합격하고, 98년에는 청년정보문화센타에서
리더십강좌를 개설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의심의 싹이 돋고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힘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육체의 힘과 영혼의 힘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힘, 육체와 의지의 힘에 의존하려고
했다.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뜻은 사명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믿기 전의 소망과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으로 흘러갔다. 기도가 약해지고, 결국은 없어지고,
신앙이 습관처럼, 악세사리처럼 전락한다. 하나님의 뜻과
기도와는 무관하게 나의 의지와 힘으로 일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벌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 나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는 사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마음이 흔쾌하지 않고,
예전의 내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의 내가 아니다.

  성령이 한번 임하면 다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는다는
김영호 목사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무책임하게 약속하시는 분도 아니고
응답하시는 분도 아니다. 약속하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든 기필코 이루시는 분이다.
나로서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이다.
  하나님을 믿은 처음의 그 마음으로, 그 절박함과 그
애절함으로 돌아가자. 나 이미 죽은 몸. 하나님이
없었다면, 그 구원의 사역,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상태인 것을. 이제 사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이고 죽는 것 또한 그러하다.
2년 전의 그 간절함으로 헌신의 기도를 드리자.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시 천일을 기도하고 만일을
준비하자.

“하나님은 내 인생의 태양이시니 그 빛이 없으니 살 수
없고 암흑의 천지를 헤매도다.
  하나님은 내 삶의 행복이시니 그 손길이 없이는 번뇌와
고통의 나날을 지새우도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글로 다 못하니 河海보다 넓고
天空보다 깊도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 2년 전에 썼던 그
내용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자.
학교도 財團도 그룹도 만들고, 글도 쓰고 말도 하자. 오직
하나님의 힘만이 나를 이끌 수 있다. 이것은 내
힘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은 너무 적고
너무 약하기에 어떤 일도 지속적으로 할 수가 없다. 아니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主이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를 본받는 종이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닮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삼위일체와의 단절은 황폐만 남는 것을......



2001년 2월 7일 수요일

  우연히 집어든 ‘쥐라기 공원(Jurassic Park)’를
읽으며 수 천만 년 전에 살았던 동물의 복제를 생각한다.
수 천만 년 전의 유전자로 인간이 동물을 복제할 수
있다면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영(靈)으로 인간을 충분히
부활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선배의 소개로
치료의 은사를 가진 분을  만나고 그의 독실함을 보았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

  거의 1년 만에 새벽기도를 갔다.  

  소망도 없이 비전도 없이 헤맨 지가 반년도 넘었다.
나는 지금 두 손에 공을 6개, 7개를 들고 공중으로 계속
던지면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공 돌리기를 하고
있다. 나의 몸이 셋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은데......
  나의 인생에서 어느 공을 택할 것인가. 이 선택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머리로,
글로, 그림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 공을
선택하지 못했다. 이것이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가.
이러한 상태에 빠진지 벌써 몇 년인가. 아마도 3년은
되었고,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때부터인 것 같다.

  귀국하여 북한동포돕기운동을 마무리하고, 97년의 대선
경선이 끝나고, 북한교회재건 사역자연수 이후 아마도 그
때부터 이러한 혼란과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98년
내내 고민했고, 99년에는 2월말에 이 고민을 풀기 위해
북한강변에 있는 금식기도원에 갔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금식기도를 하리라 작정하고
갔다. 하버드에서 공부한 바 있는 리더십 지식과 1년 간
진행한 리더십 강좌를 가지고 그 전부터 생각해오던
조직(재단법인이든, 사단법인이든)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체계적인 리더십 공부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갈 것인가.
철야기도를 하고 하루가 지나자 더 이상 기도가 되지
않았다. 리더십연구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9년 5월 리더십개발을 위해 5명의 팀을 구성했고, 처음
8개월간은 참으로 열심히 했다. 12월에는 사무실도 냈다.
그러나 작년 봄을 거치면서 진척은 지지부진하고 여름이
되어 온갖 불화들이 나타났다. 4월의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5월말로 끝나는 이수인 의원의 국회임기에 맞춰
나의 보좌관 생활도 끝내려고 작정했다. 10년간의
국회활동을 끝내고 20-30대 청춘을 통해 생각한
통일시대와 민족국가혁신을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설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불안했다.

  당장의 고민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 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내 평생 그때처럼
그토록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다. 이제까지 내
생활을 책임져주신 이수인 선생님에 대해서도 ‘이제는
독립’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앞길이 막막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생각에 여유가 없어진다. 아마 이것도
불화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이 세상의 큰일을 해보겠다고
덤벼들면서 웃옷을 벗는 순간, 나는 오금이 저리도록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주춤하고 후퇴했다. 리더십개발원이 아니라 다른 데서
생활비를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로 했다. 친구가 노무현 최고위원의 비전책
만드는 작업을 책임지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내 손에
돌려야할 공이 또 하나 생겼다.

  세종리더십개발원의 일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이수인
선생과 거리가 생겼다. 작년 1월 이후엔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선생님과 불화가 일었다. 선생님을 모신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이 총리를 돕기 위해 칠곡 선거에
1달간 관여했다. 낙선했다. 이 총리를 중심으로 한
선생님의 꿈이 무너지고, 97년에 귀국하기 전부터 내
마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 기대도 무너졌다.
이 선생님이, 10년 간 나의 사회생활을 이끌어준 師父께서
작년 6월 국회퇴임 후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세종을 만들고 리더십강좌를 진행하면서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나의 활동과 강의가 점점 힘을 잃어간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 성경의 리더십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하면 참으로 힘있는 리더십 강의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럴 정도의 성경공부도 되어 있지 못하다.

  리더십도, 정치도, 공부도, 나의 힘으로 하고자 한 것은
모두 진척이 없다. 온전한 만족이 없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또 다른 인생의 대안이 떠오르고 나는 헤매인다.
공이 7개, 8개로 늘어난다. 내가 선택해야 할 하나의 공을
찾지 못한다. 이 게으른 생활에서 7개, 8개의 일을 동시에
진행한다.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나는 하소연하듯 묻는다. 허공에, 친구에게, 내
자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
  나는 이 물음을 벌써 반년 이상이나 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답을 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알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뭔가가 가리워져 있고 나아가기가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나아가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하나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종이 되기 싫어서. 독립하고
싶고,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하고 싶어서. 육을 버리고
영만을 좇기가 싫어서. 하나님은 영이고 인간은 육이라는
생각에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분리시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작년 여름 이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고, 대구의 아버지는
死線을 넘나 드셨다. 내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계시지 않지만,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내 앞에, 내
안에 계시지만 나는 문안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뜻을 계속 좇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욕심을 좇고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도 보지 않고... 나는 교만한 자로다. 어리석은
자로다. 게으른 자로다.
  나는 이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마음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인생의 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리더십 강의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꿈도, 비전도, 사명도
보이지 않는다. 간절하고 생생한 소망도 없다. 그래도
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살찐 돼지처럼 우리를 뒹굴고
있다.

  이제 하나의 시대, 하나의 세상이 끝나는가 보다. 지난
20년 간 내가 구축해온 나의 세상이 무너짐을 본다.
대학에 입학한 뒤 지난 20년 간 추구해온 신기루의 시대가
끝남을 본다.
  나는 지난 몇 달간 크나큰 은혜가 재앙으로 느껴지고,
참 감사가 비난으로 뒤바뀌는 지옥의 문턱을 보았다. 지난
10년 간 나의 생활을 인도하고 나를 사랑했던 이수인
선생의 존재가 오히려 내 인생의 마이너스로 생각되었다.
당신의 존재로 하여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황금같은 시기를 놓쳤다고. 차라리 선생을 일찍 떠나 나의
일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4년전
미국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하버드에서의 공부보다도
미국에서의 박사학위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내 인생을 더 힘들고
어렵고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세(末世)에는 모든 것이 뒤바뀌게 보이는가 보다. 내
인생의 말세에 가치의 기준이 무너지고 세상에 동화되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영광과 은혜의 아버지를
원망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은총을 체험했기에 속세의 길로
쉽게 발을 되돌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새로운 길을 나서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
사이에서 하염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오! 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처럼 울부짖는 자로다.
영(靈)과 육(肉)의 갈림길에서, 신의(神意)와
인욕(人慾)의 문턱 위에서, 세상 근심과 심령 의심
사이에서......

  지난 4년간 나는 항상 입으로 되뇌었다. 식사 기도에도,
주일예배에서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해주십시오.”
  방황과 안일의 세월 중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그 강렬한 응답과 은은한 행복을 맛본 사람은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세상의
어떤 행복도 그에 비교될 수 없음을 안다. 그것을 잊을 수
없다.

  4년 전 귀국에 앞서 금요기도회 시간에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물밖에 머리를 내밀지 못하고 잠수하고 있어야 할
이무기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단련시켜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지금 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수님 앞에, 세상 옷
다 벗고 가진 것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통 하나로 서
있다. 영육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할 정도로
단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멍들고 할켜진 상처들을
내보이며 그렇게 서 있다.
  또 아버지께 살려달라고 한다. 도와달라고 한다.
4년이라는 긴 세월을 허비하고 돌아와서 다시 길을 알려
달라고 한다. 아버지의 뜻을 알려 달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고 막대한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성경
한번 일독하지 않고, 전도 하나 제대로 못한 어리석고
게으른 자식이 탕아(蕩兒)처럼 돌아와 있다.

  기도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나는 너의 기도를 다 들어준다. 악한 너희 인간들도
네 자식을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 하신다.
‘나’의 일, ‘아버지’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2001년 2월 25일 일요일

  아버지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고 하신 이후, 나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말씀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2월 11일, 18일의 일요일에 나는 낮 예배뿐만 아니라
저녁예배에도 참석하고, 저녁예배가 끝난 뒤의 구역장
학습에도 참가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의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며,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되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하나님과 둘만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저녁예배시간의
성경공부는 내가 나가야 할 바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하다.
11일 주일 낮 시간에 ‘당신은 감격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가’라는 박광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흘린다.

  18일 주일에는 ‘은혜받아야 산다’는 주제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축복을 기원하며 밤새도록,
환도뼈가 탈골될 때까지 씨름하여 ‘간사한 자’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의 뜻을 가진
이스라엘로 축복을 얻는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을
들으며 내가 어쩌면 야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에 죄의 용서를 받을 때 밤을 세워서라도 용서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하나님과 씨름했고 그 응답으로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김 목사님이 내게 주신 나다나엘
또한 예수님이 ‘너는 참이스라엘이다’라고 한 사람이
아닌가. 참이스라엘이란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뀐 뒤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나다나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다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의 '얍복, 완전한 항복의 자리‘라는 한글번역 설교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힘있는 설교를 듣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이후 윌커슨 목사의
모든 설교를 다 읽어보리라 작정하고 모든 내용을
디스켓에 다운로드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것을 읽고
있다.

  지난 주 테잎 48개로 구성된 빠른 성경통독테이프를
샀다. 지난 4년간 항상 말씀에 주려왔고, 최근에 어느
집사님이 나를 보지도 않고 나에 대해 ‘큰 권능은 있으나
말씀이 없다’고 한 평가에 나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테이프를 통해 올해 안에 최소한 30번은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2월 7일 이후 나는 새로운 소망의 힘이 생겨났다. 특히
지난주 월요일부터 나는 동생 정(政)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정이의 그 불치같은 병도 하나님의 힘이라면,
예수님의 그 따스한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이에게 나의 간증문과 여러
사람의 간증문을 매일 E-mail로 보내고 정이가 완치됨을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확신했다.
              
                        *                        *
  어제 24일 토요일, 고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 유성으로 혼자 차를 몰고 내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찬송가를 틀어놓았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군병이 된 성도가 마귀를
물리치는 승전가였다. 나는 대학생 때 운동가를 부르듯
그렇게 한 손을 불끈 쥐고 손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했다.
저녁 7시 30분경 차는 신탄진 근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정이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수님, 백부장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중풍에 걸린
그의 종의 병을 고쳐주기를 구했고, 예수님이 이에
응답하여 친히 그 병자에게 가시려 했으나, 백부장이 오실
필요없이 단지 나으라는 말 한마디로 낫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크다고 하시고, 가시지
않고 나으라는 말 한마디로 그 즉시 종이 나았습니다. 또
어떤 여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주기를 원하자 처음에는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계속
졸라대자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고
그 즉시 딸이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종도, 여인의 딸도
한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백부장과
여인의 간청과 그 믿음을 보시고 전혀 모르는 사람,
믿지도 않는 사람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이 아들의 간청입니다. 정이를
낫게 해주이소. 예수님은 아무 관계없는 백부장, 여인의
청도 들어주셨습니다. 아들인 저는 그들보다도 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저의 온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 정이의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수인 선생님은 몇 년 전에 제 조카가 잘못을 저질러
유치장에 있을 때 조카를 돌봐달라는 저의 전화 한 통화로
온갖 노력을 다해 유치장에서 조카를 석방시켜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번도 저의 조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저의 부탁만으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예수님과의 이 대화(對話)가 끝나가는 순간
감전되는 것처럼 강렬하게 성령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 몸이
격렬해져옴을 느낀다. 차를 갓길에 주차시키고 온 몸과
마음을 성령이 움직이는 대로 맡겼다. 머리로 입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혀는 휘말려 소리를 낸다.
찬송테이프에서는 예수의 군병들이 마귀를 무찌르는
승리가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한편으로는 소리를 지르며 아멘을 외치고 온
몸은 감전된 듯하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 동안 예수님이 정이의 병을 낫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제 정이의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성령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곧 바로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예수님이 정이의 병을 낫게 해주시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사모님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고
정이는 외출 중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 이 증거를
집사람에게 남기기 위해 전화를 했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경이었고 신탄진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기뻐
찬송가를 더욱 크게 따라 부르며 유성인터체인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유성인터체인지를 1km 가량 앞둔 지점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떨려옴을 느꼈다. 나는 2차선으로 50km 정도의
저속 운전을 했다. 그러나 점점 손이 강하게 떨려왔다.
다시 차를 갓길에 세웠다.

  차를 세운 뒤 두 손은 공중으로 벌려졌고, 10개의
손가락 끝으로 엄청난 에너지(氣)가 뿜어졌다. 처음
성령을 체험할 때 혀를 뽑아내는 듯, 강하게 밀어내는 듯
했던 그 상태가 이번에는 10개의 손가락 끝 부분에서
재현되었다. 나의 두 팔은 하늘을 향해 벌려진 채로
10개의 손가락 끝은 떨어져라 밀어내는 에너지(氣)를
발산하고, 입으로는 예수의 군병이 마귀를 무찌르는
찬송가를 힘차게 따라 부른다. 아멘을 연발하면서, 참으로
신나고 씩씩하게 장단을 맞추면서. 그리고 소리를 외친다.
“하나님 아버지 치유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권능을 주시옵소서!” 온 차안이 외침으로 인한 수증기로
가득 차고 손가락은 원래의 상태로 점점 회복되어갔다.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진(餘振)으로 손가락
끝은 계속 아렸지만 약속시간에 두 시간이나 늦은 나는
계속 차를 몰았다. 식당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내려오면서 희한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내 열 손가락을
내보이며 아직도 얼얼하다고 말한다.

  토요일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놀고,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천안에서 열리는 리더십 강좌를
위해 차를 몰았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다시 한번
그 느낌을 반복해본다. 무협지에 나오는 장풍(掌風)과도
같은 열 손가락의 지풍(指風),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진짜 치유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는가? 어제 저녁
고속도로 위에서의 경험은 미국에서의 경험 이후로 4년
만에 처음이 아닌가? 그리고 손가락의 경험은 내 생애
처음이고 아직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성령님이 나의 기도를 강하게 도와주셨다는 생각에
기뻤고 새로운 소망이 넘쳤다.

  이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도 이 세상을 능히
이기고 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큰 능력을 아버지 하나님이
주셨다. 이 날의 3시간에 걸친 리더십강의는 3년 전
리더십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힘이 넘쳤다.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오르듯 힘차게 강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예배에 참가하고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다.


2001년 2월 26일 월요일

  오늘도 윌커슨 목사의 두 설교가 나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다. 앞으로, 남은 교회에 초대 교회 이상으로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부어줄 것이라는「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구한 것 이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그것이다. 설교를 읽으면서 아멘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특히 「구한 것 이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읽으며 나는 하나님이 왜 정이의 병을
토요일 밤에 즉시 고쳐주시지 않았는가에 대한 대답을
구했다.

  지난 5년간의 나의 신앙생활을 보아도 하나님은 구한
것을 그대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구한 것, 기도한 내용
이상의 것을 응답하셨다.

  첫째, 나는 미국의 수련장에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강렬한 성령의 불세례를 주셨다. 이때 하나님이
성령을 그토록 강하게 부어주시지 않았다면 설령 죄의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나의 신앙생활은 샘이 얕은
물처럼 말라버렸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성령의 체험과
그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지 않는가.

  둘째, 이현이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단지 울음이
그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현이의 울음을 그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항상
피어나는 웃음을 주셨다. 나아가 우리 가족 전체에게
기쁨을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구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주신다.

  셋째, 내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나는
북한동포를 굶주림에서 살려달라고, 우리 민족을
살려달라고 구했다. 내 기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은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피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각종 원조로 북한의 식량사정을
개선시켰으며, 국민의 정부 등장으로 남북관계까지
개선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와 목사를 압록강,
두만강변으로 보내 탈북자를 선교하게 하고, 수많은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북한동포를 위해 기도하게 했다.

  넷째, 귀국에 앞서 나는 4년 간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내 그것들이 바다와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만큼의 막대한 고통과 노력을 하나님께 구했다. 그러나
지난 4년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내가 구한 것
이상의 고통을 주셨고, 어떻게 보면 내가 구한 것
이상으로 너그럽게 지난 인생의 찌꺼기를 없애게 하셨다.
이것도 구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다섯째, 지난 여름 연로한 아버지께서 너무나 큰 수술을
하시고 도저히 깨어나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기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분의
간호와 기도 덕분에 하나님은 아버지를 완쾌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술전보다도 더욱 맑고 건강하게 하셨다.

  따라서 지난 토요일의 정이에 대한 기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한 것 이상으로 주셨다고 믿는다. 정이의
병이 그 즉시 낫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을 그에게, 또는 나에게 준비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정이에게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 집안의 구원까지도 해주시겠다고 생각하실 수 있다.
나아가 나의 기도로 정이 혼자만 낫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다른 수많은 사람까지도 낫게 하실 그 무엇을
준비해 두고 계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 만큼 세밀하고 깊고 넓고 멀리 바라보신다.
  나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능력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너희는 내가 한 것 이상의 능력을
보이리라. 내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서 너희를
도움이라”는 말씀 믿고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지 구할
것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대담하게 구할
것이다.


2001년 3월 10일 토요일

  애굽 탈출에서 가나안 직전까지....나는
이스라엘이었다! 모세가 아니었다. 나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를 읽으면서 전율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지금 내가 바로 이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가! 두렵고
부끄러워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족속을 통해
하나님은 아버지에 대한 지금의 내 마음, 이 패역한
마음을 어찌 이리도 생생하게 보여주시는가!
  한때는 안락했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그 과거가
그리워, 젖과 꿀이 흐르는 진리의 삶 가나안이라는 그
미래가 불확실하여 모든 것을 돌봐주시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반항하고, 끝내는
모세에게, 하나님께 반역까지 하는 이스라엘은 바로 내가
아닌가! 이스라엘족속들이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행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적을 보고도 열 번이나 그를
시험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았듯이 나도 지금까지 많은
체험을 하고서도 다섯 번이나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았던가!

  나는 그 엄청난 성령세례를 받고 물세례를 받고 은혜를
입었으나 그 직후 불화가 있자 곧 바로 하나님을
의심했다. ‘도대체 영(靈)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성령체험이 참으로 혼란스럽게 만드는구나’라고.
  성령의 열매인 큰 기쁨을 맛본 뒤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성령은 있지만 과연 하나님은
전지전능한가.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무작정 따라가도 되는가’ 하고.
  미국에서 그렇게 기도하고 한국에 와서 북한동포돕기
일이 일단락 되었을 때, 북한교회재건 사역자들에게
불화가 일어났을 때 나는 또 다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성, 나의 의지와 힘에 의존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뜻을 좇고 그것을 이루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의 특이한 경험 뒤 정이의 병이 즉시 낫지
않자 나는 다시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의심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의 세계가 물질적 세계와 직접 관계가
있는지, 성령이 물질세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과연 성령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지
회의했다. 아마도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고 하신 뒤, 목사가 되리라 생각하고
성경공부를 매진한데 대해 나 자신과 주위에서 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 하나님 이 의심과 두려움이 결국 패역으로,
반역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패역을 실토하겠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저는 육과 적대되는 영, 물질세계와
무관한 영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곳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너무 힘들어 들어갈
수도 없다고. 들어가도 버틸 수 없다고. 그리고 만일 영의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구약에 무수히 보이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 인간을 멸망(滅亡)케 하신다면 저는
대항하겠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의 부모 형제
친척과 친구 이웃과 우리의 조상과 이방인들까지 그 힘을
모두 합해 비록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지옥에서라도
하나님께 대항하겠다고. 어차피 수많은 우리 조상과 친척,
친구들이 지옥에 가있고 또 갈 것인데 나 혼자 빠져나와
천당에 가느니 같이 지옥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가로질러 광야에 다다랐을 때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집트에서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풍족했는데 이게 뭐냐, 황야에서 죽으라 고생만 하고.
차라리 이집트에 그대로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시내산 앞에서는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자기가 만든
우상에 굴복하고 의존하려 했다. 가나안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는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지레 겁을 먹고 거기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은 지 5년이 되는 지금 믿기 전의 그
소망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 것처럼, 그들은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한다. 이것이 결국
고라의 반역으로, 이스라엘 온 족속의 반역으로 발전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영(靈)적인 삶, 젖과 꿀이
흐르는 나의 가나안이 한편으로는 두려워 육(肉)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생각이
패역으로 발전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저의 패역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의 죄를 실토하고 회개하오니 이 대역죄를
용서하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출애굽에서 신명기까지의 성경을 통해, 그 이스라엘을
통해 저에게 가나안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눈앞에 있는 가나안을
보면서 반역한 것처럼 저의 반역도 젖과 꿀이 흐르는 저의
가나안이 눈앞에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적시에 성경을 통독케 하시어 이 귀중한
진리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명기 32:11-12)

  하나님을 믿은 지 5년째에 처음으로 신구약을 모두
통독했다. 성경전체는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인간을 업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지’(출애굽기 19:4)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을 일관하고 있는 것은 ‘거룩’이고, 신약을
일관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이 ‘거룩’과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이 땅과 저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만드신다.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켜 창공을 함께 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처럼.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치기 전에 높은 산 바위 구석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독수리는 그냥 보통 재료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시를 꺾어서 보금자리를
엮는다. 그리고 토끼와 노루 등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가시 위를 몇 겹으로 얹어서 가시가 가죽을 뚫지 못하게
한다. 가죽 위에서 독수리 부부가 뛰어보며 가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새들의 깃털로 둥지를 채워
푹신푹신하게 만든 다음 그곳에 알을 낳고 새끼를 친다.
  독수리는 암수가 번갈아 가면서 알을 품는데 새끼가
부화하면 열심히 짐승을 잡아서 새끼를 기른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새끼들은 털이 나고 눈이 날카로워지고
부리가 무섭게 나고 발톱이 생긴다. 그래서 새끼가 어느
정도 상당히 자라서 날 수 있게 되었다 싶으면 어미가
새끼의 날개를 살펴본 뒤 새끼 위에서 너풀거린다.
  독수리 어미들은 새끼 위에서 자꾸 너풀거리면서
독수리가 얼마나 힘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새끼들에게 '우리 부모는 굉장한 날개를
가졌구나. 어마어마하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 독수리가 둥지에 올라와서 새끼를
보고 날개를 펴면서 날개에 올라타라고 한다. 그러나
아늑한 둥지에서 평안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새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미의 날개 위에 올라 탈 이유가 없다.
전부 둥지 안으로 움켜 든다. 몇 번이고 어미 새들이
둥지에 앉아서 날개를 펴고 올라타라고 해도 올라타지
않으면 아늑했던 둥지를 모두 훼파한다. 깃털을 모두
치우고 둥지를 감싸던 짐승의 가죽도 벗겨버린다. 이제
둥지에는 날카로운 가시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리고
어미들은 새끼들을 굶기기 시작한다. 어미 독수리 부부는
짐승을 잡아서 새끼들 보는 앞에서 나누어 먹고, 새끼들이
배가 고파서 좀 달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사랑스럽게 다정스럽게 고기를 뜯어서
먹여 주던 어미들이 이젠 새끼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니 새끼들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고, 며칠을
굶겨 놓고 난 다음 또 날개를 너풀거리면서 새끼들에게
올라타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중에 가장 용감한 새끼 한
놈이 올라가서 날개를 잔뜩 쥔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둘째도 셋째도 나머지는 혼자 남아 있을 수 없으니까
날개에 올라탄다.

  그러면 어미가 새끼를 날개 위에 태워 날아서 둥지를
떠나 푸른 창공을 나는데 새끼들이 겁에 질린 채 날개를
잔뜩 쥐고 밑을 보니,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 있다. 구경을
하고 높은 바위 위에 내리니 이미 어미가 아주 맛있는
잔치상을 펼쳐 놓았고, 새끼들은 오랫동안 굶었기에
포식을 한다. 그리고 나면 어미 독수리들은 새끼들을 다시
날개 위에 태워서 세상 구경을 시키고 또 맛있는 것을
먹게 한다.
  이러한 것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난 다음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날개 위에 얹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른 어미는 밑에서 날고 있다. 그때 상당히 높은 곳에
올라갔던 어미가 그만 날개를 접어 버리면 새끼들은
총알같이 떨어지고, 떨어지는 새끼들은 죽지 않겠다고 온
힘을 다해 날개를 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돌덩이처럼 떨어지게 된다. 그때 밑에 있던 어미 독수리가
받는다. 그리고 또다시 하늘 높이 올라가 떨어뜨린다.
그러면 새끼들은 죽지 않기 위해 날개짓을 하고 밑에서
어미가 또 받아 준다.
  오전 내내 나는 연습을 시키고 나면 어미들은 새끼들을
바위 위에 앉혀서 맛있는 것을 먹이고 잠시 쉬게 한 다음
오후에 또 나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 해서 끝까지 나는
놈은 살려 놓고 끝까지 날지 않은 놈은 그대로 떨어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독수리는 이와 같이 자기 새끼를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이다.

  독수리는 그 새끼들을 날게 하고 자립하게 하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독수리는 눈이 날카로워서
멀리서부터 폭풍우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폭풍우 냄새를
맡는다. 큰 폭풍우가 다가오면 새끼들을 산 벼랑 끝에
일렬로 세운다. 그리고 날개를 펴고 공중을 바라보게
한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천둥벽력이 친다. 무서운 소나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와서 그들에게 부딪히면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에게 '자 발을 놓아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잡고 있던 바위에서 발을 놓고 바람을 타고
일직선으로 하늘을 날아오른다.
  순식간에 독수리 어미들과 새끼들은 편대를 짓고 구름
위로 올라간다. 하늘에는 태양이 반짝이지만 구름
밑에서는 천둥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진다. 홍수가 나고
다리가 무너지고 집이 떠내려가고 거대한 재난이 나타나도
독수리 부부와 새끼들은 그 폭풍우를 피해서 구름 위에서
편안하게 날고 있는 것이다.
  이 폭풍우를 피하는 마지막 훈련을 시키고 난 다음에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떠나가게 한다.“(조용기, 「가시
보금자리」중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이주하고 아주 기름진 고센땅에서
번성한 뒤 이집트왕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모두
독수리새끼가 부화하고 가시둥지를 벗어나 어미 독수리의
날개 위에 올라탐과 같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의 인생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나는 동경대에서의 유학을 마칠 때까지 고센땅의
이스라엘같이 참으로 지식과 경험, 자신감이 풍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둥지의 가시처럼 갖은 갈등이
시작되었고 독수리 어미의 날개를 올라타듯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자신의 날개 위에 태우고 창공을
나르며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다. 나는 한편으로는
황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둥지가 더
이상 털이 푹신푹신한 곳이 아니라 가시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잊은 채 옛날의 그 둥지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나를 창공으로, 절벽으로 데리고 온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리고 처음 날개를 접고 떨어뜨렸을
때 나는 원망을 넘어 반항하고 반역까지를 꿈꾼다. 어미가
없었으면 하는 독수리 새끼처럼.

  나는 이때까지는 감히 날개 짓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날개를 퍼덕인다. 살기 위해,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아래에서 받쳐주심을 믿는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날개를 접지 않아도 스스로
각오를 하고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비행기에서 한번도 낙하산을 타 본적이 없는
사람이 등뒤에 있는 낙하산 믿고 천길 하늘 아래로
뛰어내려야 하는 것처럼, 그래야만 살수 있는 것처럼.

  성경 전체를 새끼독수리를 훈련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때, 구약 전부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낳고 둥지를
훼파하며 새끼를 날개 위에 업어 절벽으로 가는 단계에
해당한다. 한번 떨어뜨려 보기는 했으나 날지를 못했다.
돌덩이처럼 그냥 떨어진다.

  구약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인간은 과연 독수리 새끼인가’ 하는
점이었다. 하나님이 독수리라면 우리는 과연 독수리
새끼인가? 아니다. 참새새끼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니다.
참새새끼조차 되지 못한다. 불나방 정도에 불과하지
않는가! 눈앞의 이익, 정욕이라는 불을 향해 죽는 줄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 하루살이.... 그렇다면 불나방,
하루살이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독수리 새끼들에게나
가능한 고난도 훈련을 시키는 하나님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은가. 헛수고만 계속 되풀이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지 않은가. 구약의 하나님이 어리석지
않다면 구약에서 행한 수많은 하나님의 활동,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그 지시와 권고, 질책과 징계는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거룩’을
위함이다. 거룩이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identity)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거룩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거룩하고 동시에 우리 인간도 거룩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없음을, 거룩하지 않은 것은 토(吐)하게 됨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미물(微物)이 아니다. 인간은 천하고 더러운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이다.
하루살이, 불나방이 아니다. 참새도 아니다. 하나님이
독수리인 것처럼 인간도 독수리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불나방은, 참새는 절대로 독수리가 될 수 없다.
오직 독수리새끼만이 독수리가 될 수 있다. 구약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독수리새끼임을 보여준 것이다. 비록 날지는
못했지만.

  독수리새끼의 날개 짓은 신약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지 않았다면 독수리새끼는 돌덩이처럼 그냥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그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들, 야곱의
아들이라 해도 제대로 된 날개 짓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떨어지는 독수리새끼를 받아주고, 날 수 있음을
격려해주고, 인간이 독수리새끼임을 자기 자신을 통해
거울로 보듯 눈으로 확인시켜주고, 성령을 부어 주사 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땅에
떨어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날개 짓을 한다. 많은
사도들, 성도들이 날개 짓에 성공하여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다른 모든 독수리새끼들에게 함께 하늘을
날아오르자고 한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은 사랑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사랑으로,
성도들의 이웃사랑으로, 원수에의 사랑으로....값 매길 수
없이 무한한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계신다. 나같이 패역한 놈조차도 용서하시고 일을 같이
하자고 하신다. 그 만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하시다. 큰 폭풍우가 불어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 폭풍우의 냄새를 맡고 벌레들은 예사롭지 않게
움직인다. 추수할 알곡은 사방에 널려 있는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하신다. 지금 추수하지 않으면 폭풍우에
쓰러져 싹이 돋고 썩어 버린다고 하신다.
  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제가 저의 죄를 용서받아
그것을 묵상하고 기뻐하고  가만히 앉아 회의(懷疑)하고
있는 것이 사치임을 이제야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날지 못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구원받은 자들이 벼랑 끝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면 이 또한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팔다리 걷어붙이고
어디든지 뛰겠습니다. 미력하나마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을 돕겠습니다.


2001년 3월 21일 수요일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 하나님이 ‘20세 이상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에서 헤매면서
죽어야 한다’는 선고를 내렸을 때, 모든 이스라엘 족속은
그 끔직한 결과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즉시 태도가 돌변하여 하나님이 광야로
가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무리를 지어 가나안이 보이는 산으로 올라갔다.
이스라엘 족속이 회개 이후 가나안으로 돌격한 것은 또
한번의 불순종이었고, 아말렉과 가나안인이 산으로 올라간
그들을 전멸시켰다.  

  나도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 잠시나마 패역을
생각한 뒤 나는 그것이 엄청난 죄임을 깨달았다. 앞으로
4년간 아니 40년간, 지난 4년과 같은 방황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했다. 나는 회개한 이후 곧
바로 가나안으로 진격하리라 생각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용서해주실 거야. 나는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죄를 짓지는 않았어. 나는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이고, 성경을 통해 그 생각이 죄임을
알자마자 하나님께 회개했어.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카인, 소돔과 고모라....이 모든 죄인들은 죄를 짓고
한결같이 회개하지 않았는데 비해 나는 회개를 했지
않은가. 바로 지금이 미국에서 귀국한지 만 4년이 되는
때이니, 그리고 그 4년간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것같이 내가 방황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일거야.」

  이런 생각으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까지의 성경을
읽으면서, ‘요단강 도하’에 대한 온갖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 읽으면서 요단강 도하작전을 짰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갔기 때문이야.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가. 나도 나의
가나안을 두려워 말아야겠다. 담대해야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나아가야겠다. 두려움과 의심은
바로 믿음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불순종과 반역, 패역의
원인이다. 두려워말자. 언약을 앞세우고, 정결히 하여
나아가자. 하나님의 역사하심 믿고 요단강물을 밟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자.」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인터넽에서 우연히 본
‘갈렙 이태화목사’의 설교를 읽고 다 무너졌다. 이
점에서도 나는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았다. 이갈렙 목사의
「회개하다 혹 죽을까 하노니」라는 설교제목처럼, 이대로
이 상태에서 내가 요단강을 건넌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역을 회개하자마자 그
반작용으로 가나안으로 입성하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 회개하는 사람이 이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회개를 혹 하지 않습니까? 내게 좋은 일이면 할렐루야
감사하면서 찬양하면서 가다가 내게 싫으면 막 돌아서
버리는 이런 식의 회개를 혹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권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유익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태도라면 여러분,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입니까, 아니면
자기 중심입니까?......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도, 죄 지은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해결해보려고 하지 않고 내 중심으로 모두 풀고
있는 겁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자기의 회개를, 하나님 앞에서 죄 지은
사람이 자기의 회개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다
그겁니다. 하나님은 회개만 나타나면 꼼짝하지 못하고
"어 회개로구나. 어 회개님, 예 예. 예 예." 하나님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려는 이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
중심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나가나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면 된다,
회개하면 된다’ 라고 하지만 회개해도 안 될 수 있어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위에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저는 증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도록
하는데 관심을 두어야지, 회개하고서 내가 자유를 얻고
내가 용서받아서 내가 어떻게 좋은 데로 가보겠다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회개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참
회개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갈렙 목사의 설교처럼 나는 아직까지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이 모든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中心이 아닌 내 中心은
교만이자 불신이고 나아가 패역이다.
  의심이란 무엇인가? 의심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대상과 자기를
분리하여 상대를 자기마음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태양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태양계를 지구
중심으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꿰맞추는
천동설(天動說)과도 같다. 내 중심으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忠誠)한다는 것은 충(忠)이라는 글자가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 중심(中心)으로 사는 것이다. 판단과
생각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6-8)  두 마음에서 의심이,
의심에서 두려움이, 걱정과 근심이, 불안과 소심함과
패역이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온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태양과
목성 사이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 자기, 하나님과 세상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된다.  태양이 지구를 돌 수는 없다.
비록 그렇게 눈에는 보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지구가 달 중심으로
돌 수는 없다. 황금 송아지로 대표되는, 인간이 만든
우상을 믿고 섬기는 것은 지구가 달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가증한 짓이자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 중심을 확고히 하고 지구가 태양을 돌 듯 그렇게
살겠다, 지구가 태양만 바라보고 살 듯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 진리의 삶을 사는 것,
40년의 광야생활이든, 물 속이든, 죽음이든, 지옥이든
상관치 않고 그 믿음대로, 진리대로 사는 것이 순종이다.

  이갈렙 목사는 또 말씀하신다. “당신은 왜 예수님,
하나님을 믿느냐?”
  나는 고백한다. “저 자신이 통제불능 상태일 때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동되어 믿었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가고 생활문제가 급박하게 다가왔을 때, 세상(나)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 유일한 선택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면 저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갈렙 목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저도
처음에는 천당 가려고 믿었지만, 예수님과 거룩한 정이
들고 보니 피를 나누고 보니, 이제 내가 주님이 어딜
간다고 해서 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지옥 가지 아니하고
천당의 주인이시니, 그가 만왕(萬王)의 왕이시고
만주(萬主)의 주(主)시고, 천국을 창설하시고 주님을 이길
다른 신(神)이 없기 때문에 다행이지만, 혹시 우리 주님이
그럴 형편이 아니되신다하더라도, 지옥으로 우리 주님이
쫓겨가신다 하더라도, 이게 내 팔자네 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주님을 믿어버렸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내 스스로 묻는다. “기찬아, 너는 왜
하나님, 예수님을 믿느냐?”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로 생각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응답하시기에 믿습니다. 비록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부인할래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죽음에서 구한
생명의 은인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반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저를 괴롭고 힘든 길, 나아가 죽음의 길로 이끌어도,
다리가 부러지도록 몽둥이로 저를 때리는 두려운 아버지라
해도 우리 아버지, 저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대들 수
있겠습니까, 고아처럼 떠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한달 보름 전에 나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제 아버지께 “저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웃, 저의 원수를 제
자신처럼 사랑하겠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제 세 가지의 관계를 생각한다.

  첫째는 나와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 예수님은 목자이고 나는 양(羊)이다.
푸른 풀밭으로 물가로 양을 인도하는 목자. 100마리 양
중에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노고하는 인자한
목자. 근시안이 되어 먼 앞을 볼 수 없어 목자의 목소리가
아니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양. 자신의 힘으로는 이리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결코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양.
순한 양.
  양인 나는 주 하나님,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
안에 항상 자리할 것이다.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 그 거리 안에서 항상 대화할 것이다. 주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채널을 고정시키고, 모든 문제를 주님과
대화하여 풀어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갓 태어난
어린양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님이 팔을 벌려 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에 항상 있을 것이다. 주님이 바로 안을 수 있는
거리, 주님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거리, 여기서 나는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주님을 피부로 느끼고 코로
냄새맡지 않으면 또 다시 나는 실족하고 방황하고 시험에
빠진다.
  또 어떻게 보면 나는 연(鳶)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바람이고, 예수님은 연날리는 사람이고, 성령님은
연줄이다. 바람이 없으면 연은 날 수 없다. 연은 아무리
잘 날다가도 바람이 잦으면 그대로 주저앉고, 바람이
고르지 않으면 그대로 땅에 꽂힌다. 바람이 불어도 연줄이
끊기면 연은 하늘을 떠돈다. 결국은 나무에 걸리고 땅에
떨어진다. 우리는 모두 줄 떨어진 연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나와 세상과의 관계이다. 세상에 대해 나는
독수리이다. 세상에 대해 불나방, 하루살이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같이 날아오른다. 주(主)를 앙망하며 세상에
대해 강한 눈과 부리와 발톱 그리고 날개를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는
독수리새끼처럼 둥지를 벗어나 시련과 성숙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제 나는 스스로 어미의 날개 위에서
뛰어내려 나는 연습을 한다. 내 스스로 등뒤의 낙하산
믿고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뛰어 내린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소돔성에서도, 출애굽에서도 그런 자들은 모두 죽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누가복음, 9:62)고
하셨다. 그런 사람은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셋째는 믿음의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이다. 나와 형제들,
우리들은 비유컨대 기러기이다. 기러기는 수 천리 머나먼
길을 편대를 지어 나른다. 편대형으로 머나먼 길을 가면서
항상 서로 격려하고 도운다. 그렇게 하여 어려운 길을
쉽게 가고 상승효과를 낸다. 기러기는 모두 한편으로는
‘이끔이’(leader)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따름이’
(follower)이다.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는 최선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수한 후 뒤로 빠져 따름이의
위치로 간다. 그러면 그 다음의 기러기가 또 앞장선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안식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승리한다. 모두가 승리자이다.
  이 땅에서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을 이룰 때까지,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때까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까지, 천국에 갈 때까지 우리 모두는
이끔이이자 따름이로서 협력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각자가 주체이며 수평적
협력자들이다. 한 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6-27)    


2001년 4월 4일 수요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가! 또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계신가! 참으로 하나님은 오묘하고 전지전능하시다.
구약성경 욥기에 대해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읽었다.
고난의 대명사인 '욥'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연구소로 나와서 난생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의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었다.
4월 1일자 욥기에 대한 참으로 은혜로운 설교였다. 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깨달았다.


2001년 4월 5일 목요일

  이제 요단강을 건넌다.

  요단강을 건너다 죽어도 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광야에서 방황할 수 없다. 죽어도 건넌다. 건너다
죽더라도 건넌다. 두려움이 없다. 더 이상 광야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광야에서 사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나안이 두려울 게 없다. 죽음도 이 광야보다는
나을 것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여호수아처럼
담대(膽大)할 것도 없다. 담소(膽小)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홍해와 요단강의 중간에 있는 광야는 가장 비참한
인생이다. 이집트와 가나안 중에서 나는 가나안을 택했다.
육과 영 중에서 나는 영을, 영육을 모두 주관하는 성령님,
하나님을 택했다. 세속의 삶과 예수님의 삶 중에서 나는
예수님을 택했다. 사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믿고 가겠다.

  나는 오직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의 일을 하라”는
말씀만 믿고 갈 것이다. 지금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나의 일’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최소한 3년 동안은 하나님께 푹 빠져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데 신학대처럼 좋은 것이 있을까. 만일
신학대학원에 가는 것 보다 더 하나님께 빠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온 신경을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만났지만 지난
4년 간의 방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그래서 헷갈렸다. 홍해에 이어 두 번째 장애물인,
그리하여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옆과 뒤 그리고 아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 활로, 총으로 과녁을 맞추듯이 온 신경,
오감(五感)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과녁을
뚫듯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야만
안식(安息)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예수님을 닮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지난 4년 간 열 번이나 하나님께 나의 몸과 마음과
뜻을 모두 바치겠다고 맹세해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하나님께 거짓 맹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다.
  앞으로 4년 간은 하나님께 푹 빠져 있을 것이다. 나
자신, 우리 가족 전체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맡겨두고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
입고 자는 것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 맡긴다. 이제 나의
직업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내 일의
중심이 아니다. 정치든, 연구든, 리더십이든 모두
취미생활일 뿐이다. 여가활동일 뿐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종이다.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고 나는 종업원이다. 하루 8시간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1주로 따지면 44시간 이상을 하나님의
일에 투여한다. 앞으로 5월 31일까지 50여일간은 하나님께
온 몸과 마음으로 헌신 기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 내
죄의 용서를 빌고 정이에게 영육의 치료가 일어나고
일가친척이 모두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여쭈어 볼 것이다.    


2001년 4월 10일 화요일  

  요단강을 건넜다.

  내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기뻐하셨다. 4월 5일 요단강을 건너리라고 마음먹은 다음
날부터 성령께서 이 결정을 기뻐하시고 도와주셨다. 오늘
아침에는 부활절맞이 새벽기도에 처음으로 가서 하나님께
나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달라고, 우리 일가친척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나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우리 가족과 친가와 처가
그리고 선생님의 가족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일가 모두가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의
간절한 기도를 성령님이 도우신다. 할렐루야!  


2001년 4월 11일 수요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
과연 이 세상에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박광석  목사님을 통해 내가 요단강을 건넜음을
확인시켜 주셨다. 새벽기도에서 성경 봉독한 구절은
여호수아 4장 1절에서 9절이다.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 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 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여호수아 4장)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나에게 ‘너는
이제 요단강을 확실히 건넜다. 요단강을 건넌 기념비를
세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하나님의 힘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실, 그리고
광야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목사님을 사용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고 계시다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성경구절을 통해,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나의 상태를
체크케 주시고 인도해주시다니! 지난 2월 7일의 부르심
이후 하나님은 나의 발걸음 하나 하나를 분명하게 인도해
주시고 있지 않는가.

  나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나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달라고, 나의 일가친척이 모두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한다. 나는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말씀과
정이를 완치시켜 주겠다고 하신 그 응답을 언약으로
내세우고 간절히 기도한다. 친가와 처가 그리고
선생님가족 등 일가친척 모두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그 처지를 생각하며, 모두 영육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이것은 엄청난 영적 전쟁이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마와 사탄과 귀신은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어제처럼 성령님이 기도를 도우시고 나는 울부짖는다.
이전에 고속도로상에서 경험한 것처럼 다시 손가락이
뜨거워지고 자력(磁力)같은 에너지를 느낀다. 감사를
드린다. 온 몸은 땀으로,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2001년 4월 12일 목요일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 왜 일찍이 이 설교들을 듣지
못했을까. 지난 4년간 고민한 많은 문제들이 여기서 다
해결되지 않는가. 성령 하나님을 공손히 인정하고,
사모하고, 환영하고, 모시고, 의지하며, 감사하고,
찬양하자. 성령 충만하여 새로운 사람, 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일가친척을 위한 나의 기도를 도우시리라.

  인터넷에서 조용기 목사의 성령에 대한 설교인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 ‘새해를 성령님과 함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혜사 성령님을 정말로
아시나요?’,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 ‘오순절 날에
임하신 성령’,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고 들었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자’(1992. 1. 9) 라는 제목의 설교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선생은
속사람과 겉사람,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끝없는 투쟁에
관해서 로마서 7장 14절로 2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도의 자기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영이 죽어 있고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육의 노예가 되어 살았기 때문에 내적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법을 깨닫게 되면 육과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영과 육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갈등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과 육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에는 끊임없이 육의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여버리고
신령한 사람이 장성하는 것이 신앙의 성장 요소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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