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18

일시:3/23/2018

찬송가:251(놀랍다 주님의  은혜)


1. 지난 주에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절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절대믿음은 삶 속에서 만들어져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서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아멘 하면서 순종하고 따라 가는 아멘의 신앙이 오랜 시간 연단 받게 되면 절대 믿음이 된다고 말입니다. 자라나려고 부단히 애쓸 때에 얻어 지는 믿음이 절대 믿음입니다. 절대 믿음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처럼 들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절대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적을 맛보기 위하여 절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이 절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은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따라서 달라집니다. 큰 믿음이 있으면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지요. 


 눅17:3-4절<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서 일곱 번 돌아와서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용서하라! 일 평생 동안에 일곱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일곱 번 죄를 내 이웃이 내게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내게 죄를 지어도 짜증나는데,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죄를 거듭 거듭 짓고 잘못했다고 빈다고 할지라도 일곱 번 다 용서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이 아니고는 이런 용서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짜증이 나고, 심해지면 미운 마음이 들게 되지요. 제자들이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 우리 주님께 이런 요청을 합니다.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5절에 보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결코 나를 해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고 강하다면 형제가 짓는 죄에 대하여 무한하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을 무슨 믿음이라고요? 절대 믿음입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자매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커야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죄를 지을 때 몇 번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믿음의 크기만큼 당신의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일곱 번은 딱 일곱 번이 아니라 무한히 많은 횟수를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2. 사순절 기간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사순절 기간의 백미인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 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지요. 회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우리의 죄와 어두움 때문에 우리의 심령과 삶이 깨어질 때가 많습니다. 깨지면 아프고 괴롭지요. 그러나 나의 깨짐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깨지는 것도 은혜이고, 부서지는 것도 은혜이고 구멍 숭숭 나 있는 나의 연약함도 은혜입니다. 왜 그것이 은혜인가요? 내가 지금 걸어가는 길이 광야 길인데, 나의 깨어진 부분, 구멍 난 부분 사이로 물이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광야에 물이 공급되고 풀이 돋아 나지요. 나의 허물과 약점들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내게 거하도록 힘쓰길 바랍니다. 깨어져야 하나님이 쓰신다! 족장인 야곱도 얍복강가에서 깨어졌을 때에 하나님이 쓰셨고,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깨어짐이 있었을 때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옥함이 깨어져야 향기를 낼 수 있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회개는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그 지은 죄에서 떠나 주께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내적으로는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적인 마음의 결단이 있기는 한데, 외적인 구체적인 삶의 변화나 전환이 없다면 그런 회개를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불완전한 회개라고 부르지요. 


 삭개오의 경우 눅19:8-9절<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우리 주님을 만난 다음에 했던 행동의 변화입니다. 이런 행동의 변화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가 있나요? 삭개오가 진짜로 우리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관장입니다. 여리고성은 왕의 대로가 지나는 곳이라 큰 세관이 있었고, 그 세관의 장이 삭개오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직책을 이용해서 돈을 많이 벌어 모은 사람입니다. 당시의 세리들이 그렇듯이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신이 부당하게 벌어 모았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기금으로 내 놓았고, 또한 누구의 것이든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물어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세리들처럼 삭개오도 예수 믿기 전에는 돈이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인생에 있어서 돈보다 더 값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모았던 돈을 아낌 없이 이웃에게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몇 해 전에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자기에게 모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눅3:8-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모두 불에 던져 진다! 열매는 행동을 의미하지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는 받지 말라. 군인들은 힘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월급을 족한 줄로 알라! 무리들은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 회개는 가던 방향에서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뒤에 두고 멀리 가던 우리들이 이 길이 잘못 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 길에서 돌이켜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회개라고 부르지요. 


 회개는 첫째로 죄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53:6절<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두 번째는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셋째는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결단과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눅15:19-20절<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회개에는 두 종류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심이라 불리는 회개가 있고, 자신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윤리적이면서 도덕적인 죄에 대하여 돌이키는 회개가 있지요. 회심이라고 불리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 일이지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와 있는 죄에서 해방되는 일이지요.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지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생들은 이미 원죄 아래 있기 때문에 영혼이 죽은 상태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은 있는 데 그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 가운데 영혼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엄마의 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영혼이 있습니다. 원죄라는 것은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채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태어나니 영적인 생명이 없는 것이지요. 침팬지나 원숭이는 영혼이 없습니다. 오직 인생들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기관인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태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다윗은 시편 51:5절에서 잘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내가 스스로 내 의지로 지은 죄가 아니기에 나의 책임은 아니나 여전히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 가야 합니다. 이런 원죄를 벗어 버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길-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몰랐던 것, 이것이 가장 큰 죄인데, 이 죄를 자백하고, 우리 주님이 내 속으로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회심이 일어납니다. 이런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 밖에는 일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11:18절에는 이 회심을 생명 얻는 회개라고 기록해 놓고 있지요: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도덕적으로 짓는 죄를 우리는 자범죄라고 부르지요. 우리의 욕심에 끌려서 우리의 의지대로 짓는 죄가 바로 이런 죄입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죽었던 영혼이 살아 났지만, 우리의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런 죄를 자범죄라고 부르지요. 자범죄는 예수를 영접했다고 자연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없어 지나요? 지은 죄를 자백하고 지은 죄에서 돌이켜서 두 번 다시 같은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자신이 그런 죄를 지었다고 시인하고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 내가 도적질 했습니다. 주님 용서 해 주십시요. 내가 그를 죽였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요. 내가 간음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용서를 청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자범죄가 용서함을 받고, 더 이상 그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게 되지요. 그 지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그 죄 책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자기가 매일 매일 짓는 죄를 빨리 빨리 처리 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두면 그 죄가 내 마음 속의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아 버립니다. 그러면 그 죄는 시편 19:12,13절에 의할 것 같으면, 숨은 허물, 숨은 죄가 됩니다. 그 숨은 죄가 어떤 일을 하나요? 나를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그 죄 때문에 나의 삶은 고달파 집니다. 삶에 어두움이 찾아 오고, 또한 삶이 황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왜 내 삶에 그런 곤고함이 찾아 오는 지를 모른다는 것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내가 지었던 죄, 아직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기어지지 않는 바로 그 죄 때문에 내 삶이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가라 앉아 있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잊어 버리고 있었지만, 나의 과거의 죄를 다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 부탁을 하십시요. 나로 하여금 내가 지은 죄를 기억케 만들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내 과거를 조명해 주심으로써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어두움과 죄의 세력을 보여 주십니다. 그 어두움을 보고 그 죄악을 보았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빛 가운데 내어 놓기만 하면 그 어두움과 죄악이 깨끗이 씻어지게 됩니다. 내가 매일 매일 짓는 죄는 매일 매일 예수의 보혈로 씻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조목 조목 자복해야 합니다. 몽땅 묶어서 도매금으로 용서를 구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축조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기도하지요:내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이런 기도를 하지 말고, 내가 기억 못하고 있는 죄를 성령께서 기억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회개 비슷하나 회개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가룟유다의 뉘우침을 들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후회를 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했던 행동을 뉘우치고 후회는 했지만, 그것이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가룟유다는 회개의 전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가룟유다가 스승인 예수를 사지로 몬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살을 했지요. 마태복음27:3-5절 참조:가룟유다는 예수께서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고, 목매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신이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고자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선한 양심을 가졌지요. 죄를 씻는 방법이 우리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 아니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일어 났습니다. 가룟유다의 죄는 그가 목숨을 끊음으로써 속죄되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자기의 목숨을 끊은 것은 그의 죄를 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승을 배반한 죄 위에 또한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살인죄를 하나 더 추가 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 가르치신 속죄의 방법이 결코 아니지요. 반면에 우리는 사도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도 가룟유다와 같이 주님을 배신하는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배신은 가룟유다의 배신보다는 세상적인 판단이라는 관점에서는 훨씬 가벼운 죄이지만, 역시 배신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 죄입니다. 베드로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심히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았고, 심령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알았고, 지은 죄를 심히 슬퍼했고, 주님께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지은 죄를 알고 뉘우치기는 했지만 주님께로 돌아 가지 않았던 가룟유다와는 판이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참된 회개를 통하여 교회사에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251장/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우리의 죄를~


켐연장

2018.03.27 05:58:22

2018년 3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323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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