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 The Cambridge Korean Presbyterian Church : Boston, MA ::
 
금요기도회-225 
일시:5/11/2018 
찬송가:433장 

말씀 사역: 
살세렛 기호:구약 성경 가운데, 오경에 나오는 4개의 동사에 부기된 기호입니다. 그 네 개의 동사의 왼쪽에는 세로로 된 짝대기가 그려져 있고, 그 동사 위에는 쇠스랑 모양, 체인 모양의 부호가 놓여져 있습니다. 체인 모양의 기호가 위에 놓여 있는 동사는 중요한 의미와 교훈이 담겨 있기에 그 단어에 이르러서는 멈쳐 서서 눈을 감고 그 단어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창19:16절<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한국 개역 성경에는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전에는 그냥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체하매, 즉 와이트마흐마흐 입니다. 

 롯과 롯의 가족은 소돔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소돔성에 죄악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동성이 실제로 그런지를 조사하고 소돔성을 멸망시키려고 두 천사를 소돔성으로 보냈습니다. 마침 소돔성의 광장에 앉아 있던 롯이 이 두 명의 천사를 보자 곧 그들이 거룩한 사람들임을 알아보고 자기의 집에 모셔서 접대를 하게 되지요. 두 천사가 롯에게 소돔성에 내일이 되면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 부어져서 소돔성이 멸망하리라는 소식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빨리 롯은 자기의 가족을 이끌고 소돔성 밖으로 달아나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긴급한 소식을 접하고서도 롯은 느적느적 거렸습니다. 왜 느적느적 거렸을까요? 소돔성에 투자해 놓은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뼛골이 부서지도록 일해서 성공해서 쌓아 놓은 재물을 놓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몇 시간 후면 재앙과 죽음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그 동안 쌓아둔 재물을 잃어 버릴 수가 없어서, 지체하였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재물인가 아니면 목숨인가? 돈 나고 사람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나고 돈 나지요! 돈을 끌어 안고 불 구덩이에서 돈과 함께 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돈을 버리고 서라도 목숨을 구원할 것인가? 멸망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체해서는 안되다는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준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불신자들은 오늘 이라는 시간에 결단하고서 자신의 것을 내려 놓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천사들은 말합니다:생명을 보존하여 도망하라. 멸망이 임박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끊어 내야 살 수가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가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전6:2절). 만약 오늘 구원의 때가 주어졌는데, 그 때를 미루다가 멸망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옥에는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의 소식을 듣고서도 세상 재미에 빠져 살면서 차차 믿지요 하다가 후회하면서 아차차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창24:12절<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가 이르되 라는 동사 위에 체인 표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개역 개정은 두 단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 히브리어 원전은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와요메르 라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여기에 쌀세렛트가 놓여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에게 늦둥이로 태어난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일족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여행을 하지요.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헤브론에서 하란까지는 약 800km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하란 땅에 있는 나홀성 샘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위하여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 드리는 것이 본 구절입니다:오늘 나에게 이삭의 배필을 순조롭게 만나게 하여 주셔서,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가정은 남녀가 만나서 이룹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주선하지 않는 한 가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가정들은, 행복하든 아니든지, 모두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 받치는 기둥들인 단체들은 참 많이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기관이 있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입니다. 교회를 축소 시키면 가정이 되고, 가정을 확장시키면 교회가 됩니다. 

 배우자는 잘 만나야 합니다. 잘못된 만남으로 가정을 이룬다면 평생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자 한다면 당사자 자신이 자신을 가꾸어서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전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꾸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배우자는 잘 갖추어진 그런 배우자를 찾는다면 결혼 할 수 없게 되겠지요. 잘 갖추어진 배우자가 갖추지 못한 배우자를 선택할 리가 없잖습니까! 자신을 가꾸고 온전하게 만들어 가면 때가 되매 하나님이 거기에 합당한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시지요.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전쟁에 나가려거든 한 번 기도하고, 항해 하려거든 두 번 기도하고, 결혼 하려거든 세 번 기도하라! 그 만큼 결혼은 힘들고 어려운 과업이기 때문에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특별하게 불신자와 결혼 할 때에는 더욱 많은 기도가 필요하지요. 결혼해서 예수 믿게 하면 되지요! 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돌변하기 쉽상입니다. 결혼하기 전, 연예할 때에는 순종 잘 하는데, 결혼하고 나면 아내의 말을 안 들어 먹습니다. 결혼해서 예수 믿게 만들겠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남편 구원은 나의 노력으로 되어 지는 일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성공한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주셨지, 영과 영이 피 튀기면서 싸우게 하는 선교지로 주시지 않았다. 우리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얻어서 세상과 싸우게끔 하시려고 가정을 주신 것이지 남편과 아내가 영적으로 싸우는 격전지로서 가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중매쟁이 입니다. 크리스찬 가정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역할이 참 크지요. 아브라함의 종이 이것을 알았기에 중매쟁이인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했고, 이 기도가 끝나자 마자 리브가를 만나서 한 눈에 이삭의 배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창세기 39:7-9절<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이 거절하였다는 동사에 체인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도 두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 원전은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와에마엔! 그가 거절했다. 칼로 무우를 베듯이 단 칼에 여운을 남기지 않고 끊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상황을 한 번 살펴 보지요. 나이 17세 때에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노예상들이 요셉을 시위대장인 보디발 집에 팔았습니다. 요셉이 시위대장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시위대장의 신임을 얻어서 그 집의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시위대장의 부인이 요셉에게 눈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못 생겼더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요셉이 무척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부인이 날마다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집에 종들이 모두 집을 비운 날이었습니다. 보디발 부인에게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해서 요셉을 낚아 채려고 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부인의 요구를 그 자리에서 묵살해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자존심을 상한 보디발 부인이 시위대장에게 허위로 고발을 했고, 요셉은 시위대장의 뜰에 있는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요. 요셉의 나이가 이 때가 20대 중반입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입니다. 이 때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성적 유혹을 이겨 내기가 힘들 때입니다. 30-40대가 되면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겠지요. 50-60대가 되면 세상 권세나 명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가 어려워집니다. 나이별로 유혹의 성격이 달라지지요. 요셉처럼 20대에는 무어니 해도 이성에 대한 유혹을 끊어 내기가 무척 힘든 시기입니다. 

 요셉이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그런 유혹을 단 칼에 내려 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왔을 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받은 어릴 때의 신앙 교육에서 나온 힘이 유혹을 이겨 낼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신약적인 표현을 쓰면 경건의 능력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받아 들이는 것은 큰 악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비족들처럼 보디발 부인의 요구를 들어 주고 보디발 부인으로부터 노예에서 해방되어 시민권을 획득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나님이 내게 참 좋은 길을 주셨구나 하면서 보디발 부인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선한 양심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른 길, 의로운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인격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 봅시다. 좋은 신앙 인격은 네모일까? 둥근 원일까? 어느 신앙 인격이 좋은 인격일까요? 우리 나라는 둥근 인격이 이상적인 인격이라고들 합니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갈 때에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 가는 인격이 좋은 인격이라고 말입니다. 모난 인격은 사회 생활 하는 동안 사람들과 부딪쳐서 상처를 주고 받지요. 그래서 적당히 사람들과 타협을 하면서 주고 받으면서 사는 것을 좋아 하지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길 좋은 신앙 인격은 둥근 인격이 아니라 네모난 인격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모난 인격은 진리에 합치되고 의로운 일들은 무엇이나 용납하지만, 불의한 일들은 결코 받아 들이지 않는 인격입니다. 둥근 인격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누군가가 뇌물을 주면 받아 먹습니다. 그러나 네모난 인격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뇌물이라면 받아 먹지 않고 거절합니다. 네모난 인격은 한 없이 마음이 넓어서 무엇이나 받지만, 그러나 죄악 된 것,. 불의한 것은 결코 받지 않습니다. 오늘 보이는 요셉은 보디발의 부인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왜냐고요? 그 일은 죄악 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절할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그 현장에서 보는 사람의 눈이 없었지만 요셉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어두움 가운데서 보고 있다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유혹 받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그랬나요?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신전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한 세상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데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신전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어디서든지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우리 슬하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신전 의식이 형성되어서 자라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여서 대학교 기숙사로 가도 아이들이 악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요. 아이들을 대학교로 떠나 보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되지요. 그러면 비록 우리 아이들을 눈으로 못 보아도 부모의 마음은 태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더 잘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지요. 

 레8:22-23절<또 다른 숫양 곧 위임식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모세가 잡는다고 두 단어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와이쉬핫트라는 한 단어는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손으로 쥔다는 의미가 아니고 수양을 잡아 죽인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slaughter을 의미합니다. 왜 수양을 모세가 잡아 죽이는가? 아론의 제사장 취임하면서 위임식을 거행하는 제사를 드릴 때에 수양을 잡아서 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양의 머리에 안수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누가 수양을 잡고 피를 받았습니까?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양의 피를 가지고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귀를 무엇하는데 쓰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쓰겠다는 결단입니다. 또 피를 어디에 바릅니까? 아론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에 바릅니다. 왜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결단입니다. 백성들을 섬기고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결단이지요. 또 피를 어디에 바릅니까? 아론의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왜요? 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겠다는 결단이지요.  

이 의식은 제사장 아론의 위임식 예배입니다. 잡는다는 것은 제물을 죽인다. 도살한다.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흠 없는 양과 염소를 희생제사도 드렸지요.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 노름을 해서는 안되고 진정한 에배를 드려야 합니다. 나 좋으라고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라고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가 될 때에 내 영혼에 진정한 만족이 있게 됩니다. 그 반대가 되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나 자신을 잡아서 나를 죽이고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일어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롬12:1-2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자기 희생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오락입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씌면서, 찬양대의 노래 가락을 들으면서 귀에는 듣기 좋은 소리를 들으면서 피유석에 앉아서 예배라는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나를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놀음이 아닙니다. 예배는 연극이 아닙니다. 예배는 레저도 아닙니다. 이 예배의 자리는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되는 자리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려야겠지요. 찬송가: 433장

켐연장

2018.05.15 09:55:18

2018년 5월 11일 금요기도회 설교 음성파일입니다.
http://churchboston.org/sermon/2018/051120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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